top of page

My Toes Are Free. 

​ 복합문화공간 에무 2020.06.11- 07.31

1. 전시서문, <온실 속의 노마디즘_ My Toes Are Free>, 노세환 개인전 / 글/고윤정

 

노세환 작가의 과거 인터뷰나 정리한 글 등등을 읽어보니 비슷한 또래의 감성이 생각난다. 마치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면서 옛날 음악이 나오면 반가워하는 마음 비슷한 것일까.

지금의 70년대 후반생의 삶은 선배들의 운동권 세대에서 막 벗어난 세대여서 자유로운 해외 여행에서부터 문화적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한 세대이다. 서태지와 신해철도 등장했지만, 학창시절을 보내며 <전람회>의 음악을 듣고, 이승환과 이적의 노래에 젖는다는 것이 하나의 문화적 ‘세련됨’이라고 여겼던 세대이다.

한편으로는 IMF의 위기를 겪었던 세대이기도 하다. 어느어느 학교만 나와도 보장된다는 탄탄대로의 삶은 어디로 가고, 공채나 취업의 문, 부모님의 사업실패 등등으로 격변기를 몸으로 겪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예술가의 삶을 살겠다는 것은 상당한 불안감을 이미 감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쨌든 노세환 작가의 작업들은 그런 ‘문화적 세련됨’이 연상되는 부분과 삶에서 지속적으로 ‘예술가 되기’의 부분이 연계되고 있다. 미술계의 현실이 마치 실시간으로 반영되는 듯 20대, 30대, 40대 초반을 거치면서 ‘예술가’와 ‘예술가의 태도’에 대한 질문들은 끊임없이 진행된다.

회화과를 나왔지만 사진을 매체로 사용하면서 바뀌어가는 사물에 대한 접근, 미디어에 나오는 다큐 영상을 보면서 변화되는 삶의 태도, 사람들에게 익숙한 사물과 익숙치 않은 접근에서 나오는 균열감을 세심하게 살펴보면서 작업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어떤 현상들을 예술가로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작업에 반영해야 하는지 결정해 가는 길이 된다. ‘미디어가 하고 있는 행위와 비슷하다’ 는 작가의 인터뷰에서처럼 노세환은 관객과의 마주함에 대하여 고민한다. 그런 면에서 ‘이적’과 ‘김동률’이 생각나는 유행가/대중가요의 느낌이 나기도 한다. 작가의 시리즈 중 <Melt Down> 시리즈가 유독 관객과 많이 만났던 시리즈이기도 하다. 어떤 카테고리의 예술 작업들은 어느 순간 관객에게 안착되고, 관객이 그 내용에 감정이입이 되면서 ‘나의 것’이 아닌 그것을 즐기는 ‘관객의 것’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멜트다운 시리즈가 다소 그런 잇아이템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Melt Down> 시리즈는 작가를 상업작가와 미술관 작가를 나누어 보게 되는 지점에 서 있게 했던 시리즈이기도 하다. 미술계의 유래 없는 호황기를 누리면서 상업화랑 작가로 더 알려지게 되었던 지점에서 예술가 스스로 겪었던 미술계의 구분짓기와 혼란이 이후의 작업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나의 이미지, 하나의 작품이 탄생되는 과정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두었던 노세환은 이후 전시에서 같은 그릇인데도 배달할 때 쓰이는 용기와 옥션에서 45억에 팔린다는 그릇, 미술관이라는 전시장에서 오는 권위 등에서 오는 균열감에 주목한다. 예술계에서 상품화되거나 박물관 입장으로 인정받는 도자기/그릇을 들여다보면서 어쩌면 예술가로서 진입하기 어려운 제도의 장벽에 감정을 이입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의 시리즈들은 속담을 소재로 한 작업들이다. 작가의 개인사와 ‘작가 되기’의 지침에서 오는 우울감으로 변환하는 시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속담의 특성상 구전으로 내려오는 삶의 지침과 격언 같은 것이라 익숙하게 몸과 마음에 착 붙으면서도 비틀면 위트가 생기는 면면들이 작업에 반영된다.

사실 노세환이라는 작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모르고 있다가, 토탈미술관 월요살롱 프로그램에서 갑자기 마주치게 되었다. 아직 나는 토탈에 그렇게 익숙하게 지낼 때가 아니어서 모든 것이 낯설었던 부분이 있었는데, 노세환 작가는 ‘이미’ 서로 눈빛만 교환해도 서로의 감정을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날 월요살롱을 노세환 작가가 하기로 한 날이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발표하면서 결연하게 전시를 열겠지만, 그냥 무조건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고, 초대는 아무도 안하겠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이상한 개인전이라고 생각했고, 전시에 대한 느낌은 하고 싶은 대로 했다고는 하지만 막상 현장에서 보니 특유의 깔끔함이 묻어나는 전시였다. 그때 만들었던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에서 비롯된 작품 이후에 작가는 신체와 관련된 부분에 집중하는 작업을 계획하게 된다.

그 즈음에 내가 하고 있는 댄스스포츠나 관심분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내가 하고 있는 활동에 초대를 하거나 사진을 부탁하면서 노세환 작가도 전혀 모르던 고윤정 편집장/ 혹은 고윤정 큐레이터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손동작과 커넥션, 텐션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짧게 발레를 배웠던 경험을 공유하게 되었다. 댄스스포츠의 경우에는 파트너십이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 각종 손동작으로 오고가는 몸의 대화가 춤의 전부였고, 몸의 훈련은 대부분 상대방에게 어떻게 나를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춤이다. 적절한 힘, 적절한 균형을 주고받아야 춤을 제대로 출 수 있고, 그 중심에는 손이 있다. 잠깐 내가 만들었던 워크숍에서 노세환 작가는 만약에 나의 신체 한 부분으로 동작을 만든다면 ‘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가는 회화를 하면서 나의 ‘손’으로 만들어진 작업들이 과연 예술 작품으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오랜 기간 생각했고, ‘손’은 예술가의 노동력을 상징하는 부분이자 노세환 작업의 내용들을 연결 짓는 매개체가 되었다.

백지장을 맞들면 나을 것인가 낫지 않을 것인가를 다루기 위해 A4 용지를 댄스스포츠 선수가 마주잡고 춤 버전으로 하나를 만들게 되었고, 연이어 발레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언젠가 발레를 배웠을 때 발레/춤이라는 것은 어쨌든 머리끝, 손끝, 발끝까지 몸으로 컨트롤을 해야 하는 것인데, 그 중에서도 자주 사용하지 않는 발을 마치 손처럼 가위, 바위, 보가 가능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훈련시켜야 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을 나누면서 <My Toes Are Free>(2020) 시리즈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My Toes Are Free>는 속담 중에 ‘My hands are tied’ 즉, 영어권 관용어구 중 ‘미안하지만 도와주지는 못하겠다’는 뜻을 비틀어 반대로 만약 손대신 발이 자유롭다면 적극 도움을 주고 소통 관계를 유지할지에 대한 작업이다. 손이 해야 할 것만 같은 일들을 발이 대신 해주면서 우리의 예술적 상상력은 나날이 증폭되었다. 발가락으로 지퍼를 올리고, 단추를 풀며, 가위로 꽃을 다듬고, 작은 찻잔에 차를 따르기도 하였다.

다시 예술가의 창작에 대한 지점으로 돌아가보면, 새로운 작업이 하나의 시리즈로 묶일 수 있게 된 지점은 노세환이라는 예술가의 삶에서 손과 발이 갖고 있는 의미 때문이다. 발달장애 아이들과 오랜 기간 수업을 같이 했던 작가에게 신체 중 일부가 불편하고, 다른 신체가 상대적으로 발달하는 등 균열감을 갖는 과정을 경험했던 것이 몸과 마음에 대해서 오랜 기간 생각했던 결과로 보인다. 발레리나의 발이 할 수 있는 놀라운 영역에 입을 다물지 못했던 순간들은 뒤로 하더라도, ‘발’이 지금 같은 불통의 시대, 그리고 단합할 수 없고 각자 도생해야 하는 시기에 소통을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의 작은 움직임으로 세상에 내던져지기를 바래본다.

 

 

 

 

 

 

 

 

2. 인터뷰, <20200415 갤러리와의 인터뷰>

 

관 : 제가 기획한 ‘온실 속의 노마디즘’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요새 젊은 세대들의 정신적 측면이 자유롭고 노마디즘적인 측면이 있다고 보는데, 진정한(생산적) 노마디즘을 추구하기 위한 환경과 현실의 부조화, 순응, 반발 등이 시각화되면 시대적으로도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작 : 네, 제가 제대로 잘 알고 온 것 같습니다. 제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면, 저는 원래는 회화과를 나왔어요. 그런데 대학교 1학년 때, 제가 서울에서 태어나서 쭉 여기서 산 사람이라 밖의 일들에 대해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관 : 밖이라고 하면 어떤 거죠?

 

작 : 그 당시만 해도 서울에서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정형화된 학원을 다니고, 그림을 학원에서 배웠었죠. 학원에서는 그림을 배운 게 아니고 입시시험을 잘 치르는 방법을 계속 배웠고요. 그런데 대학교 1학년 때 첫 그림을 그리면서 알았어요. 저는 네 시간짜리 그림만 그릴 줄 알았던 사람인 거예요. 한 번도 그 이상을 그려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동기인 강강훈 이런 작가들이 너무 잘 그리는 거예요. 늘 그리는 걸 좋아했던 그런 작가들을 보면서 제가 느꼈던 건, ‘나는 그리는 걸 너무 모르는 상태로 대학에 들어왔구나.’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고, 또 결과적으로도 대학교 다니는 동안에 되게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편은 아니었어요. 그림 말고 다른 방법으로 회화과를 졸업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많이 고민을 했고, 사진이라든지 영상이라든지 이런 방법들로 그림 그리기를 피해가는 방법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부터 사실 사진 작업을 하게 되었거든요.

결국 사진들이 오브제인 설치 작업 같은 걸로 겨우 졸업은 했습니다. 졸업을 하고선 학과 선생님들과 자주 만났었는데, 한 번은 학과장님이 부르셔서 졸업하고 뭐 할 거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작업을 계속 해보려고 한다고 했더니 하시는 말씀이 그럼 차라리 기획 쪽으로 해 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 ‘너는 진짜 재능은 없는 거 같다.’ 그런 말씀을 직접 하시더라고요. 그때 조금 충격적이기는 했는데 사실은 제가 모르던 바도 아니었으니까요. 감각적, 회화적으로 오브제를 쓰거나 감각적 표현 방법 그런 거에 대해서도 사실 관심이 없었거든요. 또 그 당시에 우연히 yBA 센세이션 도록을 봤어요. 그 때도 이미 도록이 나온 지 한참 지난 다음에 본 거긴 한데 ‘아, 미술이 이런 거였구나.’하는 생각을 했어요. 졸업할 때 작업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들면서, 체육이나 음악 같은 경우는 재능이 상당 부분 많이 수반되어야 하지만 미술은 그 재능이란 부분이 상대적으로 굉장히 적게 필요한 예능 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되게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 하나쯤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작업을 시작했어요.

 

관 : 평범한 사람들에게 무지 위안이 되겠네요.

 

작 : 사실은 그렇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가끔 너무 좋은 전시를 보면요, 기분이 좋거나 이런 게 아니라 질투도 엄청 많이 나고 좀 기분이 쳐지는 편이에요. 그렇다보니까 상대적으로 제가 손으로 하는 게 적은 수단인 사진을 선택하게 된 것 같아요. 학교 다닐 당시에 저에게 사진은 단지 작품 기록하는 수단이었는데, 제대로 된 사진으로 공부를 해보고 싶어서 사진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관 : 그게 대학교 졸업 한 이후입니까?

 

작 : 대학교 졸업하는 무렵이에요. 그런 생각이 들다보니까 사진학원을 다닐까하는 찰나에 우연한 기회로 한 선생님의 어시스턴트로 들어갈 수 있게 됐어요. 어시스턴트로 들어가서 진짜 많이 배웠죠. 사실은 그때 중형 포맷 카메라도 처음 만져봤어요. 그게 있다는 얘기만 들었지, 다뤄볼 기회는 없었거든요. 그렇게 한 2년 정도 어시스턴트 생활을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있다가 작업실이 너무 바빠지고 제가 작업할 시간이 없어져서 결국엔 그만두게 됐는데, 적기에 잘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저희 아버지는 갤러리를 하세요. 그 당시에 저희 아버지도 계속 물을 거 아니에요. 도대체 뭐가 될 거냐고. 어쨌든 대학교는 회화과를 졸업했으니 뭐가 될 거냐고. 저는 작업을 하겠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일단은 알겠는데, ‘작가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냐. 남들이 널 작가라고 불러야 작가지, 너 혼자 네가 작가라고 하면 작가냐.’ 이런 얘기들을 하셨거든요. 그런데 너무 맞는 얘기들이라서 약간 상처 받기도 했죠. 아버지는 되게 오랫동안 갤러리를 하셨고 그래서 작가를 너무 오랫동안 봐 왔던 거죠. 그 중에서 잘 안 되는 사람도 너무 많이 봤던 거고요. 그래서 제가 작가를 한다니까 안 시키고 싶으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관 : 그러면 사진 배울 때는 어떤 스타일의 사진을 배웠나요?

 

작 : 사실은 사진을 배웠다하기도 애매한 것 같아요. 제가 정규과정으로 사진을 배운 적도 없고, 학교 다닐 때는 교양 사진 수업을 들은 게 다였으니까요. 사진을 처음 시작한 것도 되게 웃겨요. 대학교 2학년 때쯤이었는데 복학한 선배가 지금 하는 작업이 되게 중요한 뭔가가 될 수도 있으니까 작업을 잘 찍어서 기록을, 도큐멘테이션을 잘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제가 기계치라 사진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 집에도 카메라가 없어서 FM2 조그만 카메라를 사서 배우기 시작했어요. 또 당시에 학교에 소모임 같은 게 있어서 친구들이랑 같이 스터디 그룹처럼 사진을 처음 배웠죠. 선배들 중 사진 학원을 다녔던 선배가 있어서 현상도 조금 배우고, 프린트도 많이 배웠죠. 그러고선 졸업을 하고 어시스턴트로 들어가면서 조금 전문적인 것들, 예를 들어 화이버 베이스에 프린트 하는 것, 필름 스캔하는 것, 현상할 때 푸시 주는 것, 거의 대부분의 스킬을 그때 배웠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4X5(large fomat) 카메라를 쓰기 시작했고요.

 

관 : 그러면 사진은 어떤 스타일을 선호하시나요? 좋아했던 외국 사진작가가 있었습니까?

 

작 : 네, 그때 유행 같은 거였는데 독일 사진작가들 되게 좋아했었어요. 구어스키라든지 토마스 루프, 토마스 스트루스도 좋아했었는데 그게 제 취향에 작동했던 것 같지는 않아요. 저는 내러티브에 관심이 좀 더 많았거든요. 제 이야기를 어떻게 작업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항상 고민했어요.

 

관 : 어떤 점에서 상당히 미술적이네요.

 

작 : 그렇죠. 회화를 배우면서 익혔던 습관들이 저한테는 남아있는 상태고, 그리고 그걸 사진이라는 매체로 풀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여전히 주변에는 전통적인 방식, 즉 회화 혹은 조각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사진작가들 사이에서는 엉뚱한 걸 하고 있는 사람처럼 생각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관 : 저도 이렇게 작품을 보니까 미술적 사진 작업을 하신다고 확실히 느껴지더라고요.

 

작 :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일단은 스튜디오 베이스의 사진 이런 것들보다는 좀더 fine art로써 사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었죠.

 

관 : 이런 것도 되게 좋네요.(그림1)

 

작 : 네, 이게 초창기에 했던, 저한테는 두 번째 스트레이트한 사진 시리즈에요. 저 당시에는 도큐멘테이션하고 내레이션 사이에 있는 작업들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러니까 저 때 했던 작업의 이름이 <조금 긴 찰나>였는데 당시에 셔터스피드를 1초로 정해놓고 썼었어요. 1초라는 것이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되게 짧은 순간, 그러니까 우리가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최소단위 중에 하나인데 카메라 안에서 1초는 긴 노출이잖아요. 그래서 그 간극 이런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관 : 이렇게 길게 찍은 정류장이나 지하철은 아주 멋지고 좋은데요?

 

작 : 네, 617 같은 포맷들도 있고요. 사실 지하철로 작업을 상당히 오래했어요.

 

관 : 작가님 작품 중에서 도시를 다룬 사진들이 아주 느낌이 좋더라고요.

 

작 : 저게 지금 작업이랑은 조금 다른데 이런 지하철, 기차역, 그러니까 사람들이 딱 모여서 뭔가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공간들을 촬영을 했었거든요.

 

관 : 그때 대체로 1초를 잡았습니까?

 

작 : 네. 그러니까 1초가 재밌었던 게, 1초의 노출을 주면 어떤 사람은 거의 완벽하게 서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거의 완전히 없어지기도 했어요.

그 당시에는 사진작업 때문이 아니고 다른 아르바이트 때문에 해외에 나갈 일들이 조금 있었거든요. 그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도시들, 뉴욕이랑 마드리드, 도쿄, 뉴칼레도니아, 홍콩 등등 되게 많은 도시들을 촬영하고 다녔었어요. 지금도 사실은 하고 있는 프로젝트 중에 하나에요. 지금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계속적으로 촬영을 하거든요. 이게 좀 재밌는 게 같은 공간에 가서 다시 촬영을 하게 되잖아요. 특히 뉴욕 같은 경우는 스트릿 넘버가 아주 정확하게 기록되어있어서 같은 데 가서 다시 찍으면 사람들이나 주변 환경이 미묘하게 바뀐 지점들이 재미있더라고요.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작업은, 촬영은 계속적으로 하고 있고 밖으로는 발표하지 않는 작업 중에 하나에요. 왜냐하면 이게 좀 더 쌓였을 때 조금 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작업들이라는 생각도 들거든요.

그렇게 작업을 하다가 저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스물아홉 쯤 영국으로 석사 유학을 갔어요. 그 전에 뉴욕에서 한 번 촬영을 했었는데 그때가 911 테러 있고 얼마 안 되었을 때여서 삼각대 놓고 촬영하는 거에 경찰들이 꽤 예민하더라고요. 세 네 번 잡혔는데 여기서 한 번 더 잡히면 진짜 큰일 난다고 경고도 받았었어요. 그런데 사실은 체류하는 기간에 비해 허가를 받는 기간은 너무 길고, 또 제 촬영 때문에 뉴욕에 가 있는 게 아니라서 제 작업을 경제적으로 서포트 하기에도 힘든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그래, 그럼 걸릴 때까지 찍고 나가자.’라는 생각으로 찍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걸리니까 경찰서에 끌려가더라고요. 진짜 좀 무서웠어요. 거울 있는 그런 방에서 조서 쓰고 다행히 풀려나오기는 했죠. 길게 얘기했지만 결론은 영국 가서도 그 프로젝트를 계속 했으면 했었거든요.

제 지도교수가 ‘존 힐리야드’라고 사진 베이스인 영국 개념 미술 작가였는데 그 선생님이 이 사진으로 계속 프로젝트를 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계속해서 찍었는데 영국에서도 사실은 911 때문에 똑같은 이유로 제지를 당하다 보니까 좀 무섭더라고요. 이미 내놓은 등록금도 있고 중간에 걸리면 골치 아프기도 하니까요.

 

관 : 영국에서도 911 사건이 영향이 있었나요?

 

작 : 911 이후에 모든 대도시 중간에 있는 공공장소에서는 삼각대를 놓고 촬영하는 건 지금도안 되는 일들 중 하나에요. 한국이 유독 거기에 좀 둔하고요. 동경만 가도 제지를 받는 편이고, 유럽국가에서는 거의 모든 국가가 완벽하게 제지를 해요. 그래서 지금은 가면 카메라를 바닥에 내려놓고 찍습니다.

어쨌든 그렇다보니까 촬영 허가를 받으려고 신청해놓고 기다리니까 두 달, 세 달 걸리더라고요. 그래서 기다리는 동안 놀이삼아 했던 작업이, 이 작업이었거든요.(그림2) <커피엔젤>이라고 그 당시에 이름 붙였던 작업이었는데 놀면서 했어요. 사실 되게 좋더라고요. 처음에 한국에서 학교 졸업하고 맨날 공모에다 전시 하면서 학교 다니다가 유학 가니까 학교에서 정말 조금만 해도 열심히 한다고 해주는 게 좋더라고요. 너무 편안하고 좋아서 아무래도 한국에서보다는 시간이 있다 보니까 나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게 되고 집 생각도 많이 하게 되고 그랬죠.

그 당시에, 지금은 돌아가신, 저희 어머니가 커피를 못 마시게 했었어요. 그래서 대학교 3학년 때 첫 커피를 마셨던 것 같아요.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군대 갔다가 휴가 나왔을 때 스타벅스가 이대 앞에 막 생길 때였거든요. 그래서 그때 캐러멜 마키아토를 처음 먹었어요. 세상에, 너무 맛있더라고요. 이렇게 맛있는 거를 그동안 못 먹고 살아서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죠.

저희 어머니는 그 당시 뉴스에 카페인이 청소년의 뇌 건강에 얼마나 안 좋은지에 대한 리서치 같은 걸 보신 거예요. 그런데 왜 그걸 보고 어머니가 커피를 못 마시게 했는지 생각해보니, 저희 어머니는 직장생활도 한 번 안 해보신 주부이셨기 때문에 그런 뉴스에서 나오는 말이 너무나 권위 있는 이야기인 거예요. 그러니까 어머니에게 뉴스에 나오는 얘기는 거의 모든 게 사실이었던 거죠.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한 연구에서도 미디어의 권위적인 성격 때문에 뉴스를 보는 보통 사람들은 그 정보를 무너뜨릴 수 없는 사실처럼 생각하게 된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발표를 한 적도 있고요.

그런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커피를 처음 마셨을 때의 그 순간을 당시에 집에 있던 헌 티셔츠를 꿰매가지고 저걸 만든 거예요. 오브제로 만들어서 스타벅스 커피 컵에 달아 가지고 촬영을 한 겁니다. 처음에는 ‘미디어에서 나오는 정보들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아서 정말 장난삼아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게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져온 것 같아요.

바로 다음 작업이 이 작업들이거든요.(그림3) 이 시리즈의 하얀 버전, 이런 작업들을 그때 했었어요. 되게 섬세한 하얀색 작업들, 과일 작업들이에요. <커피엔젤> 만들었을 때 친한 작가 중에 하나가 이것을 3d로 만든 거냐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게 사실은 동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사진이라는 게 기록에 훨씬 더 가깝기 때문에 사물을 있는 그대로 담을 수 있는 매체인데, 그렇게 하면서도 가장 왜곡이 많이 되는 매체이죠. 그 당시에는 3d로 빌드업 한 이미지를 만들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커피엔젤>이랑 아주 비슷한 세팅에서 과일이나 이런 물건들을 페인트에 완전히 푹 담갔다가 빼서 벽에다가 쇠로 고정을 하고 찍었죠. 바로 앞에서 촬영을 함으로써 고정쇠를 가려서, 가급적이면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은 그대로의 상태를 아주 많이 건드린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어요.

 

관 : 과일을 이용하는 아이디어는 갑자기 떠올랐나요? 아니면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작 : 저 때 과일이 주변에 있어서 사용했던 것 같아요. (웃음)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영국에 있으면서 bbc에서 만든 지구 온난화 현상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어요. 남극의 빙하가 녹고 있고, 숲이 사라지는 영상들을 계속 보고 있으니 당장 뭘 해야 될 것 같더라고요. 그들이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말아야 할 거 같은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밖에 나와서 다른 일을 하고 있으면 그것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리는 제 모습이 좀 재밌기도 했죠. 어쨌든 뚝뚝 떨어지는 것들에 대한 이미지가 남은 거 같기도 해요.

그리고 누구나 그 촉감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오브제들을 선택하는 게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페인트에 담갔다 뺀 어떤 이미지가 얼마나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가에 중점을 두었거든요. 그래서 사과, 바나나 등 어느 나라에나 다 있는 과일들을 선택해서 작업을 했었습니다.

 

관 : 그럼 이 작품은 제목이 뭔가요?(그림4)

 

작 : <멜트다운(Melt Down)> 시리즈에요. <멜트다운>이라고 하는 단어 자체는 녹아내린다는 뜻이고 작품에서 보이는 것도 녹아내리는 형상인데, 사실은 페인트라고 하는 게 녹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굳고 있는 거잖아요. 이게 서로 반대의 과정인데 시각적으로는 똑같이 나타나는 중간지점에 대한 생각도 했었고, 또 저는 이게 미디어가 하고 있는 행위랑 되게 비슷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관 : 기발하네요.

 

작 : 감사합니다. 그러다가 컬러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것도 사과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인식 때문에 페인트로 덮인 사과가 이상해 보이는 거잖아요. 컬러가 갖고 있는 스테레오 타입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사과가 빨갛다고 하는데 사과가 진짜 빨간 색이면 얼마나 사과 같지 않은지 이런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동안 <멜트다운> 시리즈 중 컬러 작업을 오래 했어요. 한 4-5년을 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짜장면 집 백자 시리즈를 했어요.(그림5) 이건 짜장면 집 배달그릇이에요. 우리는 조선백자 혹은 고려청자에 대한 이야기를 교과서로 늘 많이 배워왔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제 친구가 제가 미술을 한다는 이유로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어떤 항아리를 보러오라는 거예요. 저는 전혀 그 분야에 지식이 없지만 우선 오라고 해서 갔는데 정말 엄청 좋아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당시에 화랑협회의 아는 분께 감정을 받았는데 가짜더라고요, 그런 상황을 보니 저는 오브제나 볼거리가 우리가 보는 ‘정보’ 중에 하나라고 생각을 하는데, 정보가 지워졌을 때 사람들은 과연 그 오브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궁금하더라고요. 저는 미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딘가에 걸려있는 이미지를 그냥 봤을 때랑 ‘저 그림 데미안 허스트가 그렸대.’ 했을 때 되게 다르게 보게 되잖아요. 그 주변에 대한 정보가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게 되는 것, 결국 정보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에 주목하게 되었어요. 박물관에 가면 ‘아, 이건 진짜인가 보다.’ 하고, 리움에 가면 ‘이건 진짜 비싼 건가 보다.’ 하고, 혹은 어떤 작품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옥션에 45억에 낙찰이 되었다는 이야기들을 항상 같이 수반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제 작업에 대해서도 사실은 그런 이야기들을 듣게 되니까요.

그래서 제일 싼 그릇을 찾아봤어요. 제가 찾은 가장 싼 그릇이 배달할 때 쓰는 플라스틱 그릇이었고 그 그릇들을 사 모으러 다녔어요. 그런데 모으다 보니까 그것도 너무 많은 디자인들이 있더라고요. 사실은 그것들도 어떤 디자이너에 의해서 디자인된 것들일 텐데 용도나 재질 이런 것들 때문에 되게 낮은 취급을 받고 있는 그 갭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사진으로 작업을 시작했어요. 플라스틱 그릇을 백자를 찍는 것과 똑같은 세팅으로 촬영을 하고 그게 얼마나 가치가 있어 보이는지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작업을 하다 보니까 전시를 할 때 오브제들이 전시장 안으로 들어왔으면 좋겠더라고요. 일반적으로 미술계에서 권위 있다고 생각하는 미술관이라고 하는 장소에 플라스틱 그릇을 좌대 위에 올려놓았죠. 또 사진과 실제 오브제들을 사람들이 비교하면서 감상할 수 있게 하려고 한 것도 있어요. 그릇들을 조금 높은 좌대 위에 올려놓고 사람들이 만져볼 수 있게끔 중간에 체인을 두거나 하지 않았거든요. 아무나 만져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설치를 했었는데, 그 당시에 어떤 엄마가 한 4살 된 꼬마랑 같이 왔는데 아이가 그릇을 어김없이 만지더라고요. 제 작품은 사실은 만져도 되는 작품이잖아요. 그런데도 엄마가 아이를 호되게 혼내면서 ‘만지지 말랬지!’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미술관에 있는 건 절대 만지면 안 되는 거라고 인지하는, 미술관과 관람객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는 것도 재밌었어요.

그렇게 작업을 했는데 이미지가 알록달록해서 그런지 상업화랑에 많이 불려 다녔어요. 솔직히 이야기하면 그 당시에 어마어마하진 않지만 그래도 작품을 팔아서 돈이 좀 들어왔었고, 그래서 안주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다가 어느 날 미술관 작가들이랑 상업화랑 작가들이 같이 모인 자리에 가게 되었어요. 거기에서 나온 이야기가 상업화랑 작가들에 대한 어떤 고정관념, 혹은 미술관 작가들에 대한 고정관념 이런 것들이 되게 많더라고요. 결국 모든 작가가 원하는 건 양쪽 세계에 같이 속하는 거겠지만, 저는 어쨌든 상업화랑에 계속 있으면 그냥 이렇게 작품 생활하다가 끝나겠다는 생각이 되게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조금 더 직접적이고 내러티브가 펼쳐져있는 작업을 하고 싶더라고요. 왜냐하면 <멜트다운> 같은 경우는 제가 항상 설명을 너무 많이 해야 하는 거예요. 어머니의 커피 이야기부터 시작을 해야 이게 다 말이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싱글채널에 좀 더 관심이 가기 시작했던 거 같아요. 지금 싱글채널 작업을 하면서도 여전히 사진 작업을 병행하고 있지만 조금 더 내러티브를 펼쳐서 보여줄 수 있는 형식은 싱글채널이나 설치가 되더라고요.

관 :듣다 보니 작가님 작업을 사회적으로 환원시켜보면 일종의 인정 투쟁을 그려놓은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러니까 짜장면 그릇도 백자와 똑같은 취급을 받고 싶어 하잖아요. 바라만 보거나 만지지도 못하게 하거나 하는 것처럼요.

 

작 : 아마도 비슷한 얘기인 거 같아요. 특히나 조선시대 백자들은 실용품이었잖아요. 다 사용하던 자기들이었기 때문에 아마 그 때는 지금 이런 대접을 받을지 몰랐을 거예요.

 

관 : 그게 굉장히 중요한 지점 같아요.

 

작 : 지금 우리는 플라스틱을 이렇게 막 쓰고 있지만, 언젠가 플라스틱에 대해서 규제가 생기거나 다른 무언가 개발이 되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게 되게 가치가 생기는 지점이 또다시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게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게 바우하우스 때 만들었던 많은 것들이 지금에서야 가격이 많이 오른 상태를 예로 들 수 있죠.

 

관 : 제가 역사공부를 하면서 보니까 근대 이전의 미술은 실제로는 생활용품에서 시작했더라고요. 그래서 공감이 되네요.

 

작 : 맞아요. 유흥을 위한 것들도 많았고요. 특히나 르네상스 때까지를 보면 놀 게 없으니 신을 그렇게 많이 만들어 놓았던 거죠. 지금의 종교와는 또 다른 형식이었던 거 같아요. 사실 사진도 만들어진 목적이 놀이와 연관이 있어요. 그 당시에 사우나가 많이 발달이 되었었는데, 그곳의 대형 벽화들이 사람들의 유일한 볼거리였어요. 그런데 사우나에 더 빨리 이미지를 생산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하다가 사진이 발명된 그런 이야기도 있더라고요.

제가 평범한 사람이 하는 작업들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었잖아요. 그런 생각을 하기 전에, 특히나 대학교 때 주로 많이 했던 작업은 관음증에 대한 것들이었어요. 근데 졸업하고서 다시 작업하려고 보니까 그때서야 비로소 이게 얼마나 저랑 거리가 있는 그런 주제들이었는지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생각을 전혀 안한 상태로 작업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소 친구들 만나면 농담 하는 것도 좋아하고 미술계의 개그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사람들을 웃기는 작업들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그래서 너무 진지하고 심각한 것보다는 재미있을 수 있는 것들을 많이 생각해요 소통에 대한 걸 많이 신경 쓰지는 않는데 어쨌든 누군가가 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웃으면 좋잖아요.

그러다가 이게 그 다음 작업인데 ‘우울증에 대처하는 자세’라는 전시였거든요.(그림6) 이때는 조금 심리적으로 위축된 시기였어요. 이때가 어머니 돌아가시고 7, 8년 될 때였을 거예요.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공교롭게도 여동생은 결혼해서 미국으로 가게 됐어요. 그래서 갑자기 아버지랑 저랑 둘이서 살아야하는 그런 시기를 겪은 거예요. 그런데 어머니가 없으면 아버지랑 저랑 대화가 안 되는데 계속 이렇게 대화를 해야 하고 이런 것들이 쉽지 않더라고요.

사실은 유학하던 중간에 개인전 때문에 한국에 들어왔다가 그 사이에 어머니가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어서, 처음에는 제가 가족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아무 느낌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한 5, 6년 되니까 힘들어지기 시작하더라고요. 작업실도 처음에 반전세로 시작해서 월세로 갔다가, 크기도 줄여보고 그런데 계속 일은 해야 하는 과정들이 조금 힘들었어요. 작업을 하면 할수록 손해고, 그런데 가만히 있기도 너무 힘들고 그래서 그런 것들을 작품으로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때는 내가 나를 자각하고 이렇게 극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게 2017년 전시니까 이 작업했던 게 2016년도에요.

 

관 : 상당히 최근의 일이네요.

 

작 : 네, 상당히 최근이에요. 사회적으로는 대통령 탄핵과 촛불 시위가 있었죠. 그런데 대통령 탄핵도 사실 저랑 별로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도 이상하게 너무 슬프고 그렇더라고요. 세월호 사건 이후 ‘전국민적인 우울증’ 이런 이야기도 있었고 ‘이 우울은 도대체 뭘까?’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관 : 이건 비디오 작업이었습니까?

 

작 : 아니요. 이건 정말 많은 것들이 섞여있는 전시였어요. 왜냐하면 이 전에 했던 전시까지는 항상 딱 정리된 상태로 전시를 해 왔는데 이때는 전시할 때까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당장 그날 만드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싶었고, 전시 전체를 보면서 균형을 맞추고 그런 것들에 대한 계산을 안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정말 했던 것을 다 전시했어요.

이런 사진들은 제가 이사하는 동안 짐을 계속 줄여가니까 버려야 되는 것들을 촬영한 거예요. (그림7) 그 당시 미니멀리즘이 유행하면서 사람들이 이렇게 버리는 물건을 사진을 찍어놓더라고요. 저도 명색이 사진작가니까 의무감에 찍은 것도 있었고요. 그리고 집에서 콩 키우는 사진(그림8)이랑 아파트 근처에 있는 주인 없는 고양이들 사진(그림9)도 있어요. 고양이 작업은 재미가 있었던 게, 엄밀히 따지면 야생고양이에 가까워야 하는 들고양이가 아파트에 많이 의존하는 거였어요. 정확히 말하면 아파트에서 나오는 음식물쓰레기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인데, 심지어 누구는 고양이를 돌보고 누군가는 고양이를 없애버리려고 하고, 그런 모습이 저랑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작품들은 밑에 보면 되게 조그만 24k 금이 이렇게 올라와 있거든요.(그림10) 저게 그 당시 최저임금을 뜻하는 거였어요. 최저임금이 재밌었던 게 계속 올라가고는 있으나 올라가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고, 올라간다고 해도 행복해지지 않잖아요. 예를 들면 저는 비정규직 노동자이고, 정규직으로 회사 다니는 친구가 하나 있고, 또 하나는 개인사업자를 갖고 있는 친구가 하나 있거든요. 셋이 만나서 최저임금에 대해 이야기 하면 개인사업자한테는 너무 힘든 일인 거예요. 특히나 큰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최저임금이 계속 올라가면 점점 돈을 벌기가 힘들어지겠죠. 저는 비정규직으로 학교에서 시간강사를 하고 있으니까 일단 시간당 임금은 정말 높은데 일주일에 세 시간밖에 일을 못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비정규직이지만 저랑 최저임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런 관계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지막으로 정규직 노동자인 친구는 개인사업자 친구와 제 말을 듣고 최저임금을 올려야 한다, 말아야 한다 태도가 왔다 갔다 하는 거고요.

사실 이 개인 사업하는 친구가 금을 세공하는 세공사들에게 재료를 공급하는 일을 해요. 그래서 친구한테 부탁을 했어요. 당시 최저임금인 7,700원짜리 금을 만들고 싶다고요. 그런데 너무 작아서 아무도 안 해주는 거예요. 결국엔 77,000원짜리를 만들었어요. 근데 그것도 되게 작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시간이 금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시간이 금으로 환산됐을 때 얼마나 보잘것없어 보이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시간은 금이면 진짜 안 되는 일이에요. 시간이 금이면 우리는 너무 우울해서 살 수가 없어요.

그리고 이게 머그컵이거든요.(그림11) 이렇게 긴, 한 4L정도 들어가는 머그컵이거든요. 일단은 머그컵 네 개를 제작했어요. 영어권의 속담에 ‘A Cup of coffee, a cup of tea’라는 표현이 있어요. 어떤 일이 ‘A cup of coffee’라고 하면 되게 별거 아닌 일을 뜻하는데요. 그런데 그 컵이 이만하면 한 잔 마시는 일이 별거 아닌 일이 절대 아니거든요. 이런 식으로 속담을 이용해 나열하는 작업들을 했는데, 이 전시 이후로도 계속 디벨롭해서 작업을 하고 있어요.

이런 콩을 이용한 작품(그림12) 같은 경우도 냉장고에서 콩이 오래되면 싹이 나고 먹을 수도 없어서 심었어요. 그런데 잘 자라더라고요.

 

관 : 이 전시는 전에 했던 전시와 같은 제목인가요?

 

작 : 이 전시 제목이 ‘우울증에 대처하는 자세’에요.(그림13) 문래동에 있는 스페이스 xx라는 전시공간에서 했었는데 그때 했던 작업 중에 이게 좀 중요한 작업이에요. 백짓장이 맞들면 얼마나 불편한지에 대한 전시를 하는 거였거든요. 이것도 사실은 아버지와 저 사이의 관계 때문에 생각하게 되었어요.

집에서 설거지를 하면 아버지가 꼭 도와주세요.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혼자 설거지를 하게 만든 게 미안하다고 본인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제게는 미안할 일이 아니고, 너무 당연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상황이 자신을 슬프게 만드는 거 같더라고요. 근데 어쨌든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아버지가 도와주시는데, 그릇이 뒤집어져 있는 걸 못 보시고 그릇을 바로바로 닦아놓으세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그게 그릇에 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너무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이 오히려 많아지는데 아버지는 저를 도와줬다는 거에 대해서 조금의 성취감 같은 걸 느끼시는 거죠. 저도 감사하다고는 하지만 속으로는 안 도와줬으면 하는 그런 양가적인 마음이 있죠.

그 때 아버지께서 항상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이야기를 하세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 혹은 관용적 표현이 사실은 어떤 논리구조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혹은 과거에 얽힌 논리구조를 갖고 있는 상태일 텐데 현재도 계속 쓰이잖아요. 그 표현이 누군가의 논리가 맞다는 것에 대한 근거로 쓰이면서도 사실은 근거가 없는, 그런 지점들이 재미있었어요. 속담이든 어떤 위인의 이야기가 됐든 이것들을 이야기할 때 듣는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주기 위해 인용을 하고는 거잖아요. 그런데 실제로는 자기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 인용을 하는 경우가 많고, 화자의 태도에 따라서 청자에게 상당히 폭력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에도 주목을 하게 되었고요. 관용적 표현이라고 하는 게 신체랑 관련 있는 게 너무너무 많아요. 그런 부분이 재미있어서 여기까지의 작업으로 이어진 것 같고요.

아마 옛날에는 백지장을 둘이 드는 게 쉬웠을 거예요. 길고 얇은 종이니까 혼자 옮기는 것보다 둘이 옮기는 게 쉬웠겠죠. 그런데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백지장은 A4 사이즈의 가장 흔한 종이인거죠. 이건 혼자 드는 게 항상 더 편하거든요. 작업의 시작은 키와 덩치가 비슷한 남학생과 여학생에게 종각부터 동대문까지 A4 용지를 둘이 마주잡고 걸어가게 하는 거였어요. 지금 보니 비주얼적으로는 완성도가 모자란 상태인 것 같긴 하네요.(그림14)

 

 

관 : 이것도 설명해주실래요?

 

작 : 저희 세대는 드라마틱한 경제성장을 겪어왔기 때문에 받는 혜택이 너무너무 많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제가 가끔 동남아시아 쪽을 가보면 아직 급속한 경제성장을 겪지 않은 나라들이 있거든요. 분명히 우리나라보다 못 사는데 그렇게 천천히 발전하기 때문에 그들이 누리는 행복도 존재한다는 거죠. 예를 들면 이제는 경제 성장이 급속하게 둔화되고 이전 세대에 비해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더 이상의 혜택이 없어지는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관 : 저는 아까부터 이게 인상적이었어요.

 

작 : 이건 누가 제 작업실 냉동실에 넣어놓고 아무도 먹지 않은 아이스크림이에요.(그림15) 저는 좋아하지도 않고 유통기한도 지난 이 아이스크림은 너무 쓸모가 없어진 상태잖아요. 그래서 쓸모를 만들고 싶다는 게 유일한 이유였어요. 아이스크림 녹는 과정을 타임랩스로 촬영을 하고 그걸 비디오에 넣었죠. 이전 세대들이 했던 것들 중에 하나가 어떤 쓸모에 대한 것만 너무 많이 강조했던 게 있었거든요. 행위의 정당성보다는 결과에 대해서만 너무 많이 이야기하고 그랬으니 쓸모없는 과정을 계속 넣고 싶었어요.

 

관 : 저 빨간 과일은 무엇인가요?

 

작 : 망고에요.(그림16) 냉장고에 넣어뒀던 망고를 실온에 꺼내두면 표면에 물방울이 맺히잖아요. 시간이 지나면 물방울들은 또 없어지고요. 이런 행위들을 당시 일어났던 시위 모습과 오버랩되는 지점들을 만들고 싶어서 그 장면을 비디오의 인트로로 썼어요. 음악도 넣고요. 영상의 길이는 꽤 길어요. 한 20분정도 되는데 당시에 했던 작품과 겹치는 퍼포먼스도 같이 엮어서 편집을 했어요.

 

관 : 드디어 이번 전시 제목과 비슷한 전시가 시작되네요.(그림17)

 

작 : 네. 속담 시리즈가 조금 구체화되는 작업들이 시작 되는 게 2018년 63빌딩에 있는 미술관에서 전시를 했을 때인데요. 전시제목이 ‘콩 한 쪽은 너나 먹어. 내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있으니.’ 이렇게 되게 긴 제목이에요. ‘콩 한 쪽도 나눠 먹는다.’와 ‘내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는 두 개의 속담을 오버랩 시켜놓았죠. 속담에서 어떤 부분을 비틀어야 제가 원화는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실제로 작품 설치하는 날부터 콩을 심기 시작하거든요. 그래서 전시 첫날에는 콩이 아예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서, 싹이 나기 시작하고, 좀 지나면 꽃도 피고 그래서 나중에 콩을 수확했어요. 전시는 한 60일정도 했어요.

 

관 : 콩이 자라는 과정이 다 전시가 된 거군요? 전시 공간은 작아 보이는데 화분으로 채우려면 큰 공간 같네요. 작품이 차지하는 면적이 어느 정도 되었나요?

 

작 : 실제로 전시장에서는 전시 작품이 콩 화분인 상태로 전시가 되었고요. 전시 공간은 약 8평정도 되었어요.

콩이 계속 자라야 하니까 제가 거의 매일 가서 물을 줬거든요. 전시장 직원 분들도 제가 못 가는 날에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시구요. 그래서 그 분들에게 너무 죄송했는데 다행히 재미있어 하셔서 고마웠어요. 물을 주면 콩이 매일 자라니까 제가 일지를 만들어놨어요. 직원 분들도 이 콩에 대한 일지를 같이 써주셨죠.

또 제가 이틀에 한 번씩 시든 잎도 따고 그러다가 맨 마지막에 콩을 수확했는데요. 처음에 콩을 거의 90알을 심었는데 아홉 알을 수확을 했어요. 전시 기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많이 수확했을 거 같긴 한데 어쨌든 아홉 알 수확도 나쁘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 아홉 알을 가지고 경기도 장흥에서 이 전시를 또 했거든요. 장흥에서 수확한 것들은 한 40알정도 되었는데 그걸 가지고 경기도 아트파크에서 세 번째 전시를 했었어요. 마지막으로 수확한 콩은 또 심으려고 아직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전시는 이렇게 콩이 자라는 과정을 그냥 보여주는 건데, 이 작업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작업에서 말하고자 하는 어떤 문장을 만들고 나면 거기에서 멈춰버린다는, 끝나버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후의 과정들은 그걸 시각적으로 설득하기 위한 도구들이라는 생각도 계속 들었고요. 그래서 이렇게 전달하고픈 문장은 있지만 작품은 없는, 작품이 전시가 진행되면서 만들어지는 식으로 계속 작업을 했습니다. 이 작품 같은 경우는 콩이 자라는 과정을 촬영을 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집한 비디오를 가져가서 이전 과정을 관람객들이 같이 볼 수 있게 한 거예요.

다음 작업이 가장 최근 작업이에요.(그림18) ‘저울은 금과 나무를 구분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미국 속담에서 출발했는데, 처음에는 이런 각목들을 가지고 만든 모빌이었어요. 그 다음에는 사비나 미술관에서 했던 작업인데 이런 형태의 모빌들이거든요.(그림19) 지금 사비나 미술관 중간에 삼각형으로 된 계단에 상설 전시가 되어 있어요.

‘저울은 금과  납을 구분하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재미있는 지점은 저울이 애초에 금과 납을 구분하려고 만든 도구가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어떤 사물이던 무게만 판단하려고 만든 게 저울인데, ‘저울은 금과 나무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실 좋은 의미의 속담으로 모든 것들을 좀 더 공평하게 보자는 뜻을 담고 있어요. 그런데 그 속담을 만들어내는 순간 어떤 사물이든 무게만 판단하려고 만들어진 저울이 금과 납을 구별해야 하는 게 되잖아요. 저울은 금과 납을 구별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만 능력이 없어서 못 하는 것처럼 비춰지는 미묘한 지점이 사실은 존재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것들에 주목해서 지금은 작업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지금 토탈미술관에서 전시하는 비디오 작업이 제 작업 중에는 제일 최근 작업이에요. (그림20) ‘백지장도 맞들면 짜증난다.’의 디벨롭 버전인데요. 사실 이 작품 같은 경우는 비디오 자체만으로 된 작업을 한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지금은 조금씩 작업이 늘어나면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인 것 같고요.

스포츠 댄스 하시는 두 분이 춤을 추는데 손을 맞잡지 않고 A4용지를 맞잡고 춤을 추는 비디오에요. 춤으로 영상을 만드니까 되게 재밌더라고요.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스포츠댄스는 항상 왈츠에요. 그래서 처음에는 왈츠로 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춤추는 분들이랑 컨셉에 대한 얘기를 해보니까 왈츠가 스포츠 댄스 중에서 가장 서로를 마주보지 않는 춤이라고 하더라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봐야하는 춤이래요. 그래서 룸바로 바꿨어요. 룸바가 춤추는 둘 사이가 가장 많은 관계를 가지게 되는 춤이라고 하더라고요. 둘이서 룸바를 추는 사이에 메트로놈이 나오는 그런 영상이에요.

제 생각에는 에무에서 싱글채널들 위주로 전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8, 9개 정도의 새로 만드는 싱글 채널들만 가지고 전시를 하고 물론 주변에 오브제들은 같이 전시가 될 거 같아요. 예를 들면 춤출 때 썼던 A4용지는 같이 전시가 될 거 같네요.

계획하고 있는 건 ‘My Toes Are Free’라는 제목의 비디오를 준비 중이거든요. 다음 12월 말 정도에 새로 찍을 예정인데, 그거 같은 경우는 ‘Hands are tied.’라는 미국의 관용적 표현을 비튼 제목이에요. ‘Hands are tied.’는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다.’라는 관용적 표현인데 손이 묶여 있어서 도와주지 못한다는 표현을 비틀어서 손가락 대신 발가락으로 뭔가를 하는 그런 과정을 촬영하려고 해요.

 

관 : 아주 잘 들었습니다. 작업 스토리를 같이 들으니 아주 좋네요.

 

작 : 제 작업 자체가 생활과 많이 닿아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한참 미술시장 경기가 좋을 때 잡지에서 작가 인터뷰를 가끔 한 적이 있어요. 한 번은 제 뮤즈가 뭐냐는 질문을 받았어요. 나의 뮤즈가 뭘까 되게 많이 생각 했는데 제 뮤즈는 두 가지가 있더라고요. 교보문고하고 텔레비전이에요. 그런 두 가지도 사실은 기획이랑 잘 맞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관 : 여쭤보고 싶은 게 생겼는데요. 주제에 따라서 어떤 걸 표현할 때 작가님은 관찰자적 시점인가요? 아니면 그 속에 표현 주체가 어떤 과정을 하는지 표현하나요?

 

작 : 저는 1인칭 같은 3인칭인 것 같아요. 제 작업 자체가 늘 그래왔듯이 완전히 1인칭인데 그것을 표현할 대상이 필요하고 그 대상을 통해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걸 보여주는 거죠.

 

관 : 마지막 질문인데요. 그 1인칭은 지금 어떤 처지라고 생각하시나요?

 

작 : 저는 스스로가 특별한 처지라는 생각은 잘 안 들거든요. 그냥 아주 평균적인 한국 작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너무 잘 되지도 안 되지도 않은 작가요. 어쨌든 저는 매년 전시를 하고 있고 그렇다는 이야기는 절망을 겪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는 아니라는 뜻이지 않을까요?

 

관 : 그러면 이 주제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자기 이야기로서 풀어나가는 거겠네요?

 

작 : 그렇죠. 매우 그럴 거 같아요.

 

 

 

3. 인터뷰, <2020.06.10. 고윤정 큐레이터와의 인터뷰>

 

고 : 이번 전시 My Toes Are Free에 대해서 얘기해주세요.

 

노 : 이번에 ‘My Toes Are Free’라는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idiom expression’에 대한 이야기, ‘관용어구’를 이용한 시리즈인데요. 기본적으로 관용적 표현이 우리가 대화를 할 때 가지는 의미적인 관성을 이야기 하고 싶었어요. 사실은 관성 때문에 되게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약간의 권위 같은 게 느껴지거든요. 사회적으로 너무 많이 쓰이기 때문에 생기는 권위에 집중해서 작업을 했어요. 예를 들면 우리가 어떤 사실에 대한 근거를 제시할 때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인 근거들을 제시하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관용어구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상태로 그냥 많이 쓰이기 때문에, 혹은 옛날부터 전해 내려왔기 때문에 그냥 권력을 갖는 것들이어서 저는 그 권력에 대한 의문점을 갖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관용적인 표현들을 쓸 때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이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표현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실상으로는 그렇지 못하고 있죠. 항상 화자 중심으로 대화를 하다보니까 청자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는 지점들을 비판하고 싶었어요.

이번 작업에 원래 사용하고자 했던 관용적 표현은 ‘My hands are tied.’라는 표현이에요. 나의 손이 묶였다는 이야기죠. 저는 사실 이 표현을 영국 은행에 갔을 때 들었어요. 저는 영국에 교환학생으로도 갔다 오고 여행으로도 갔었는데 그 때는 영국 안에 소속되어야한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거든요. 그런데 유학을 가게 되니까 거기서 자리 잡을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계좌도 만들어야하고 집도 구해야 해서 우선 은행계좌를 만들려고 은행에 갔어요.  당시에 은행에서 하라는 대로 학교에서 서류를 발급 받고, 은행에 내야할 것들을 다 냈는데 계좌 발급이 안 된다는 거예요. 서류를 보니까 은행에서 요구하는 문서의 제목과 학교에서 준  문서의 제목이 달랐는데, 내용은 똑같지만 제목이 달라서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은행에서 안내한대로 요청해서 그 서류를 받았다고 했더니 그때 그 표현을 쓰는 거예요. ‘My hands are tied.’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인데 사실 그렇지 않았거든요. 실제로는 그냥 제 서류를 받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그 상황에 대해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한 말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당시에 영국의 사회적, 경제적인 상황을 보면 이민자들이 너무 많이 들어온 게 은행에서는  문제였거든요. 이민자들 혹은 유학생들이 영국에 들어와서 은행계좌를 만든 후에 유학이 끝나서 자국으로 돌아갈 때 은행계좌를 닫지 않고 나가서 은행의 한정된 구좌가 모자란다는 거예요. 그래서 계좌 신청 절차를 까다롭게 해놨던 거였고, 심지어 은행계좌를 쓸 때 사용료도 냈던 거 같아요. 어쨌든 간에 그 상황에 그 표현이 너무 얄미웠죠.

근데 되게 웃긴 게 6개월 뒤에, 거의 포기한 심정으로 같은 은행이지만 다른 지점에 간 적이 있어요. 학교에서는 학교 앞에 있는 그 지점에 꼭 가야한다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그 다른 지점에에서 단숨에 해결됐어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보면 자기가 책임지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말을 되게 많이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굉장히 절실한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일들과 같이 겪고 있는 최근의 경험들은 제가 최근에 한 3년 정도 중구에 있는 장애인 복지관에서 프로젝트를 같이 하고 있어요. 자폐인 친구들이랑 같이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들은 남을 생각하지 못하는 걸 장애로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들에게 가끔의 배려를 받을 때가 있어요. 아주 가끔인데 배려나 혹은 약간 친함의 표시 같은 것들을 느낄 때가 간혹 있거든요. 물론 비장애인이 배려해주는 것에 비하면 훨씬 미미하지만 장애인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의상으로 서로한테 관계를 가지는 문제보다 훨씬 더 진하게 오는 순간이 있죠. 그럴 때마다 장애인도 배려라는 걸 할 때가 있는데 비장애인인 우리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래서 배려라는 게 내 권한에 대한 문제 혹은 내가 할 수 있는 능력(capability)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되게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발이 나왔으니 발을 이용한 작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 구조가 만들어진 거예요.

구조가 만들어지고 처음에는 실제로 신체 장애인과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많이 찾아봤는데 솔직히 이야기하면 섭외가 좀 힘들었어요. 그리고 실제로 팔을 못 쓰시는 분들은 의수를 사용하시기 때문에 결국 발을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고요. 그래서 무용수를 찾게 된 거예요. 마침 고윤정 큐레이터님께 그때쯤에 이 기획을 도와달라고 이야기를 했거든요. 워낙에 신체 문제에 관심이 많으시고, 또 하나는 취미로 춤을 추시기 때문에 주변에 무용수 분들도 많이 계셨거든요. 그 당시에 제가 고윤정 큐레이터님이 발레 레슨을 했던 것도 알고 있어서 발레 선생님을 섭외하고 싶어서 연락을 드렸고, 이번 작업에 민경림 선생님과 같이 작업을 하게 됐죠.

처음에는 제 작업이 어불성설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생각해 보면 발로 하는 작업이 일종의 체험이나 연기에 대한 개념으로도 생각이 되더라고요. 사실 신체장애에 대한 걸 다루고자 할 때도 장애에 대한 부분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에 대해서 망설여지는 게 많았었거든요. 제가 장애인을 섭외할 때도 장애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섭외하는 게 아니고 발을 잘 쓰는 사람을 찾으려다 보니까 장애인을 찾는다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결론적으로는 발레리나 분과 작업을 하게 되었지만, 발레도 역시 마찬가지로 발을 많이, 예민하게 쓰는 행위잖아요. 심지어 근력도 있으시고. 그래서 되게 재밌게 작업했어요. 작업 결과도 저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게 나왔고요.

결론적으로 ‘My hands are tied.’는 내 권한 밖의 일이기 때문에 너를 도와줄 수 없다는 되게 정중한 표현이면서 사실은 그 권한을 넘어서면서까지 내가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관용적인 표현에 대해서 전달하고 싶었던 지점은 손이 묶여 있어도 도와주려는 의지가 있다면 발로도 할 수 있고 입으로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My toes are free’가 나왔죠.

 

고 : 이번 전시에서는 굉장히 대형 사진으로 출력을 해서 전시를 하셨는데, 이런 방식의 디스플레이에 특별한 이유가 있으실까요?

 

노 : 사실 원래 전시 계획은 사실 이런 형식이 아니었어요. 애초에는 안 쪽 작은 공간에 있는 2채널의 비디오가 메인 공간에 굉장히 크게 걸리고, 사진들은 안쪽에 걸릴 예정이었죠. 입구에 바로 들어오시면 바로 보이는 그 정도의 사이즈로 모든 사진을 프린트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이미지로 보이는 사이즈가 굉장히 커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게,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이 작게 디테일로 오는 게 아니라 굉장히 압도되는 기분으로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사진은 아직 기계가 없어서 이 사이즈로 프린트하는 게 불가능하더라고요.  저게 위아래로 2m가 조금 넘는데, 1.8m까지밖에 뽑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하나는 나중에 보관 문제도 있어서 이런 식으로 프린트가 되었어요. 어쨌든 사이즈에 대해서는 관람객이 느끼는 바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 :

또 관용적 표현에 신체가 많이 나온다는 점이 흥미로웠던 거 같아요.

 

노 :

네, 관용적 표현의 대부분에 신체에 대한 얘기가 나와요. 예를 들어, ‘Two heads are better than one.’이라는 표현에서는 머리 두 개가 머리 하나보다 낫다는 이야기인데,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와 같은 맥락이죠. 또 뭐가 있을까요. ‘Fingers crossed.’ 이런 것도 해당되고, 되게 많은 표현에서 신체가 나와요.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거든요. 관용적 표현이라는 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소재를 가져온 표현들이니까요. 그리고 어떤 문제가 생기고 해결을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이 신체와 닿아있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혹은 사람의 신체가 아니라 동물의 신체가 등장할 때도 많고요.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관용적 표현은 꽤 신체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한국말로 해서 신체적이지만 영어로 하면 ‘physical’하다고 표현이 되는데 그래서 이게 물리적인 거랑도 되게 많이 닿아있어요. 결국은 관용적 표현은 언제나 피지컬하다고 할 수 있죠.

 

고 : 영상에 나오는 동작들도 설명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여러 가지 동작이 있는데, 발가락으로 단추를 푸는 것도 있고, 꽃다발을 자르는 것도 있고, 붓으로 그리는 것도 있고, 사과를 내리치듯이 자르는 것도 있고, 차를 따르는 것도 있고. 심지어 차를 따르고 하나의 작은 잔들을 정돈하는 영상들이 연결이 되어 있는데 어떻게 이 동작들을 구상을 하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노 : 애초에 영상 초반에 나오는 행위들은 일상에 대한 지점들을 가져가고 싶었던 거예요. 아주 일상적으로 꽃을 가꾸고, 손님이 오면 차를 내고, 옷을 입는 것 등이요. 사실은 영상을 이렇게 길게 만들려고 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작업을 하면서 일상으로 보이는 모습들에서 발을 사용하는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계속적으로 머릿속에 들어오더라고요. 영상 속 발을 사용하는 사람이 뭘 하는 사람이어야 하는지 고민을 했는데, 제가 시각예술을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작가라는 직업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다음에 작가와 관련된 조금 더 전문성이 있는 것들을 촬영하게 되었죠.

그리고 조금은 장애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싶었던 것도 있어요. 사실 이 부분과 관련해 영상에 넣을까 말까 고민하다 빼버린 장치들이 몇 개 있는데요. 이걸 이야기하기 전에 제 경험을 하나 들려드려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어떤 마음에서 저 페인팅을 했었는지 생각해보면은, 20대 초반쯤에 귀가 안 들리시는 친한 작가 선생님이 있었어요. 어릴 때여서 그런지 그 분의 작업이 다양하게 ‘읽히는’ 게 부럽더라고요. 그 분은 컨텍스트적으로 레이어를 쌓는 작업을 하시는 분은 아닌데, 귀가 안 들리는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작품의 레이어가 다양하게 해석되는 그런 지점들을 갖게 되는 거예요.

제가 20대 초중반 때 저희 집은 너무너무 평범한 집이었거든요. 엄마, 아빠, 아들, 딸 이렇게 네 가족이고, 아들, 딸 그냥 대학생이었고, 아버지는 회사 다니시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셨죠. 이런 제 삶이 너무 평범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작가님의 삶 자체에서 오는 작가적인 지점이 부럽기도 했죠. 그래서 저는 영상 속에 그런 캐릭터를 넣고 싶었어요.

발 연기를 하시는 분은 발레를 하시는 분이여서 장애랑은 전혀 상관이 없긴 하죠. 그런데 제가 생각하는 캐릭터는 뭘 대충 그리기만 해도 잘 읽혀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들에 대해 약간 우쭐해하는 기분을 갖는 그런 캐릭터이길 바랬어요. 제가 그런 캐릭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뭐냐면,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특별한 걸 가지고 있든 가지고 있지 않든, 우리 사회의 비주류들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을 주류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사람들이 내려다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결국은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얘기하고 싶어서 작업을 했던 거예요. 대답이 되었으려나 모르겠네요.

 

고 :

제가 영상을 만든 걸 봤잖아요. 영상을 보니 약간 극적인 음악들을 사용하셨는데, 원래 드라마틱한 음악을 자주 쓰시나요?

 

노 :

사실 음악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되게 많은데요. 저는 굉장히 평균적인 음악 감상자거든요. 중고등학교 때는 하드락에 완전 꽂혀있었었어요. 펄잼, 너바나 등의 음악들, 당시 또래들이 많이 듣는 음악을 들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더 강렬한 걸 찾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가다보니까 그것들에 대한 해소의 지점이 사실은 클래식으로 끝났어요. 어느 순간부터 좋아하는 작곡가의 음악이 오케스트라로 연주된 걸 찾고 있고, 또 번스타인과 카라얀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혼자 분석하고 그랬어요. 근데 군대 갔다 왔을 때쯤 음악 듣는 걸 딱 끊었어요. 그 전에는 공부할 때도, 작업할 때도 음악 듣고 그랬는데 음악을 계속 듣다보니까 제가 하는 것보다 음악에 더 많이 집중을 하고 있어서 안 되겠더라고요.

그런 전환의 시간이 있어서 정말 오랫동안 음악을 아예 안 들었거든요. 노래방 갈 수 있을 정도의 음악만 들었어요. 그렇게 음악을 아예 안 듣고, 음악에 대해 스터디 하는 걸 멈추고 있었는데 영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음악을 다시 듣기 시작했어요. 필요해서 듣게 되었지만 과거에 음악을 듣던 태도들이 계속 남아있더라고요. 그래서 제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극적인 음악을 사용했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고 :

이전에 ‘백지장은 맞들면 낫다.’에서도 보통 영상 작업에서 사용하는 음악이라기보다도 사운드를 쓰는 게 많았었잖아요.

 

노 :

그렇죠. 제가 사운드를 안 쓰고 음악을 쓰냐면 사실 영상이 일종의 리듬 같은 걸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에요. 처음에 저도 비트 메이커를 써보기도 했지만 제가 만든 영상을 보는 사람들이 같이 따라가려면 약간의 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다른 시도들을 안 하는 건 아니에요. 이번 영상에도 키보드로 만들어낸 사운드가 이펙트처럼 조금 들어가요. 음악에 묻혀서 선명하게 들리지는 않지만 음악과 사운드를 함께 사용하고 있어요.

 

고 :

이번에 작업하면서는 저는 작가님이 준비한 소품이 되게 좋았던 거 같아요. 꽃다발도 너무 재밌었고 주전자도 그렇고요. 아무튼 다 재밌었어요.

 

노 :

이 전시를 구상할 때 최대한 많은 관용적인 표현을 건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주 짧은 영상 7, 8편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원래 ‘My toes are free’도 3분짜리 영상이었어요. 맨 처음에는 차 따르는 장면만 있었죠. 차 따르는 장면 같은 경우는 우리가 차를 마실 때는 혼자도 마실 수 있지만 항상 상대가 필요한 행위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어요. 차를 마시는 것을 다도라는 개념으로 생각하면 상대방이랑 같이 해야 하는 행위 중에 상대방을 위해 일방적으로 일종의 봉사를 해줘야하는 것으로 생각이 들더라고요. 은행처럼 서비스 개념이 필요한 행위들  중에 다도가 딱 부합하는 행위라고 생각을 했어요.

 

고 :

발로 할 수 있는 것과 맞으면서도 의미가 딱 맞는 거네요.

 

노 :

사실 발로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그렇게 많이 생각했던 건 아니에요. 웬만한 건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완성된 영상에서도 대략적인 구조가 손님이 오고, 갑자기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이 생기고, 그 상황에 있다 보니까 무언가를 완전히 혼자서 해야 하는 그런 상황도 필요하게 되었던 거고요. 그래서 꽃을 가꾸는 장면도 촬영하게 되었죠. 꽃을 가꾸는 것도 일반적인 형태의 꽃을 가꾸는 건 아니잖아요. 꽃들을 잘라내는 것, 엄밀히 이야기하면 꽃다발의 전체적 형태를 향나무 다듬는 것처럼 다듬는 장면을 촬영하고 싶었거든요. 사실은 민경림 선생님한테 고마운 게 제가 일부러 꽃다발을 어떻게 잘라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어요. 그냥 꽃을 잘라달라고만 했는데 마침 그걸 되게 잘 이해를 해줘서 다듬어진 꽃을 보면 아주 동그랗잖아요. 만약에 그렇지 않았으면 중간에 형태를 교정하려고도 했거든요. 근데 세세하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런 식으로 작업해주신 게 정말 고마웠죠.

꽃을 다듬는 것과 차를 마시는 것, 혼자 해야 하는 상황과 남과 같이 있어야하는 상황을 설정하다 보니까 사실 제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넣고 싶었던 것 같아요. 혹은 작가들의 태도 같은  것일 수도 있고요. 그건 마치 모범생들이 시험 전날 공부를 엄청 열심히 하고 다음날 ‘나 공부 안했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영상에 삽입되는 텍스트 같은 것들은 작가들이 갖는 오만함과, 그 오만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아주 많은 노력과, 또 그런 노력들을 안 한 척, 마치 태어나서부터 작업을 잘했던 사람처럼 쿨하게 하려는 것과 닿아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번 작업에서는 그게 결국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지점까지 가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고민하는 게 마지막 부분 텍스트들이거든요. 사람들이 이걸 너무나 오만방자하게 느낄까 하는 게 제일 걱정되는 부분이에요. 그런 오만함을 우리 대부분이 가지고 있고, 동시에 콤플렉스도 많이 갖고 있다고 생각 하거든요. 그러면 콤플렉스가 없다고 오만함이 없느냐 하면 저는 그렇지는 않다고 봐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부분들에 집중해서 텍스트를 쓰는 건데, 그 부분을 어떻게 하면 제가 원하는 대로 고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어요. 전시 준비하기 마지막, 며칠 안남은 상황에서 사실은 그 텍스트도 제가 직접 쓴 텍스트를 쓰지 않으려고 했거든요. <나의 왼발>이라는 영화의 대사에서 따오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근데 이게 아무래도 영화다보니까 주인공을 ‘어려움을 너무나 잘 극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놨더라고요. 그러니까 영화가 장애인은 생활하기에 어려울 거라는 생각을 기저에 깔고 만들었다는 게 조금 불편했고요. 근데 사실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영화를 만들고 싶은 사람의 욕망도 어느 정도는 제가 직면한 문제와 많이 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 :

그 영화는 장애인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 만들었겠네요.

 

노 :

그런 장면이 영화에 어떻게 나오냐면 사랑을 하는 걸로 나와요. 장애인이 아니더라도 항상 영화의 주인공은 어려움이 있고, 그런 것들을 해결하는 게 항상 사랑인 것도 저는 마음에 들지 않아요. 저는 적당한 오만함과 동시에 약간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지점에 대해 건드리고 싶었어요. 사실은 차를 따르는 장면의 원래 텍스트는 차를 따르는 사람이 손님이 쳐다보는 시선을 의식하는 게 있었는데 걷어냈어요. 이것도 너무 진부한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텍스트를 빼고 차를 대접하는 장면만 넣었죠. 그리고 차를 따르는 장면 이전에 발가락만 움직이는 장면을 길게 편집해서 넣었어요.

 

고 :

그 부분 좋은데 좀 긴 거 같기도 해요. (웃음) 근데 그건 언제 찍었어요? 일부러 발레리나 분께 해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노 :

네. 제가 일부러 해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사실은 영상 중간 중간에 잘라 넣고 싶어서, 중간에 필요할 때가 있을 것 같아서 찍어놓은 거예요. 영상을 만들면서 제가 좀 아쉬웠던 건 기승전결 구조를 안 만들고 싶었는데 그게 결국에 만들어지더라고요.

 

 

 

고 :

저희가 발레리나 선생님이 발을 그렇게 잘 쓸지 모르고 시작했다가 점점 내용이 덧붙여지면서 어쩔 수 없이 기승전결 구조를 가지게 된 것 같기도 해요.

 

노 :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발레리나 선생님이 발을 잘 쓸 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예측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습하지 말라고 얘기를 했던 거기도 하고요. 혹시 제일 마음에 드는 장면은 있었어요?

 

고 :

저는 꽃 자르는 장면인지 발가락 움직이는 장면이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밖이 블랙아웃 되면서 발에 딱 집중되는 장면이 가장 좋았어요.

 

노 :

저는 사실 사과를 자르는 장면이에요. 그 긴장감이 너무 좋고, 아주 짧은 장면인데 사실 제가 발로 뭔가를 했을 때 기대했던 가장 큰 긴장감이 거기 있었던 거 같아요. 솔직히 이야기하면 차도 좀 뜨거운 차를 하고 싶었는데 결국은 드라이아이스로 한 거거든요. 차에 김이 나오게 연출한 건데, 민경림 선생님이 스케줄이 많으신 분이라 발이 다치면 다음날 공연을 못해서 뜨거운 걸 못 쓰기도 했어요.

 

황 : 그래도 영상에서 발이 주전자를 이리 저리 잡는 게 마치 뜨거워서 망설이는 걸로 보이기도 해요.

 

고 :

아직 발로 하는 시리즈는 조금 더 해보실 생각이 있잖아요. 한 2, 3개 정도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뭘 하고 싶을지는 생각해보셨어요?

 

노 :

훨씬 더 많을 거 같아요.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는 않았는데, 과자봉지를 뜯는다던지 핸드폰으로 전화하고 문자하는 이런 소소한 것도 해보고 싶고요. 그런데 조금 더 극적으로 보일 수 있는 긴 액션들을 더 해보고 싶어요. 또 어떤 의식에 가까운, 세레모니의 형식과 비슷한 행위들을 해볼까 하는데 아직 구체적으로 계획은 없어요.

 

고 :

그런데 발 시리즈는 단지 발전적으로 되니까 추가적으로 더 하고 싶은 거예요?

 

노 :

그렇지는 않아요. 저는 이 영상이 딱 완성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좀 더 방점을 찍을 만한 그런 행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조금 더 구체적인 스토리도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고 :

또 다른 관심 있는 관용적인 표현은 어떤 게 있나요?

 

노 :

사실 하고 싶었던 게 있었어요. ‘빈 수레가 요란하다.’하고 ‘배가 산으로 간다.’ 그 두 문장은 꼭 해보고 싶어요.

 

고 :

둘 다 신체는 아니네요.

 

노 :

근데 결과물은 되게 신체적인 게 될 거 같아요. 배가 산으로 가려고 하면 그 배를 누군가 끌어야 하는 문제도 있잖아요. 근데 속담만 얘기하니까 뭘 해야 할 지 지금은 하얀 도화지 같기도 하네요. 그런데 사람들이 속담에 대한 인용을 너무 많이 하니까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 말을 할 때 거슬리는 부분이 자동적으로 생겨요.

 

고 :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도 댄스로 한번 찍었었잖아요. 그것도 한번 다시 작업하고 싶다고 했었는데 그건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노 :

조금 더 기계적인 생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백지장을 맞드는 문제가 생기는 지점의 텐션이 훨씬 더 필요하고 그 행위가 문제가 생길 때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어요. 사실 아직 어떻게 할지 결론은 내지 못했어요. 그건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고 : 저희가 한 달 동안 관람평을 모았는데 어떤 얘기들이 있었는지 간단하게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발은 왜 안되는가, 하는 발상의 전환과 속담 뒤의 진지함을 느꼈다.’는 리뷰도 있었고,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발로 무언가를 한다는 게 매우 어려워 보이는데 작가님은 그렇게 해서라도 누구를 위한 삶을 살고 싶으신지’, ‘발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나의 소통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런 리뷰들이 있는데 작가님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들이 잘 전달된 부분인 것 같아요.

 

노 : 네, 그렇게 봐주시면 사실 좋긴 한데, 사실 제 작업은 남을 위해 사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이런 작업을 하게 된 이유를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 부모님 혹은 학교에서 선생님들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육 받았던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순서대로 줄을 서야 되고, 남을 보면 도와줘야 되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굉장히 주입을 많이 받고 살았던 것 같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살려고 하니까 그 똑같은 어른들이 절 보고 ‘너 이렇게 순진해가지고 세상을 어떻게 살래?’ 그러는 거예요. 대중들을 보고 얘기할 때는 착하게 살으라고 얘기를 하는데, 실제로는 내가 손해보지 않는 삶을 추구하고 있잖아요. 똑같은 지점들을 상황에 따라 계속 다르게 보는, 또는 다르게 얘기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들에 갈등이 되게 컸고요. 사실 이 갈등이 계속 되는 것들 때문에 아마도 이런 작업을 하는 것 같아요.

 

고 : 관객 리뷰 중에도 이런 내용들이 있었어요. ‘작은 것부터 당연시 했던 일상에서 고쳐야 된다는 생각이 든다.’ 또 ‘발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해서 놀라웠다’는 리뷰들도 많이 있고, ‘익숙하지 않은 사용에서 오는 괴리감이 신선했다’, ‘모두들 원칙에서 벗어나 자유로움 삶을 살길 바란다.’ 이런 좋은 리뷰들이 있었는데요. 계속해서 발과 자유와 속박에 대한 단어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 제가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들을 한두 가지 물어보고 싶어요. 저희가 이 전시하기 전에 사전 인터뷰를 여러 번 했었어요. 그런데 그중에 작가님이 작업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레이어와 레이어를 쌓고 그 위에 투명한 레이어를 씌우고 이런 얘기들을 했었잖아요. 그런데 작업의 발단으로서 장애에 대한 인식이나 그러면서 발로 옮겨져 간 작가님의 배경적인 내용들이 있긴 하지만 그게 실제 이미지에 등장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제가 레이어를 쌓는 게 아니라 횡으로 펼치면 어떠냐 하는 얘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런 것을 섞는 게 나은지, 지금처럼 그건 작업의 배경일 뿐인 건지 궁금해요.

 

노 : 일단은 그 얘기를 되게 많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제가 작업할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 중에,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차를 발로 주는 건 조금 비위가 상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근데 저는 그 얘기를 듣는 것도 불편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게 결국은 또 자기 입장에서 생각을 하는 거거든요. 누군가가 차를 발로 따라준다면 얼마나 많은 이유가 그 뒤에 있겠어요. 이 문제가 문제처럼 보일 거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거든요. 그런데 되게 많은 분들이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놀랍기는 했었어요.

그리고 장애의 부분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들에 대한 것에서 저는 무슨 생각을 했냐면, 사실 이게 장애인에 대한 얘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왜냐하면 그냥 사연이 있는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인 거지 누군가의, 특정 장애를 집어서 얘기하는 거는 아닌 것 같단 생각도 들고요. 어떤 상황에서 상대방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나의 이해의 범주를 어디까지 넓혀줘야 되고 어디부터 닫아야 되는지에 대한 문제, 이런 것들에 대한 생각을 조금 누군가가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한 작업이고요. 레이어를 옆으로 넓히는 거는 현재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고 : 그리고 여러 번에 걸쳐서 발을 이용한 영상을 촬영하게 되면서 다음에는 발로 뭘 해야지? 이런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됐어요. 그래서 지금 영상에서는 순서가 뒤섞여있긴 하지만 사실 사과를 칼로 내리치는 거는 굉장히 나중에 나온 장면이거든요. 작가님이 다음 작업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좀더 팽팽한 긴장감을 유발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근데 이 영상의 발의 이미지에서는 긴장감을 좀더 유발하는 과정으로 가는 게 자연스럽긴 한데, 이게 속담시리즈와의 관련보다는 좀더 퍼포먼스적 요소들이 더 중점적으로 드러나는 건 아닌지 궁금함이 있습니다.

 

노 : 그런데 저는 퍼포먼스가 방법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지, 긴장감에 대한 이야기와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사실 작업하면서 발로 할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많다는 생각이 점점 들더라고요, 그리고 발을 써주신 선생님이 정말 기가 막히게 발을 잘 쓰긴 하셔가지고 제가 그것들을 보면서 더 할 수 있는 게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 조금 더 이 작업 자체를 디벨롭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조금 더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길이 조금 더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 : 작품이나 관객들의 리뷰나 그런 것들은 대략적으로 전체적인 이야기를 나눠본 것 같고요. 혹시 오신 분들 중에 손과 발에 대한 것, 그리고 자유로움과 억압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할 얘기가 있으실 것 같긴 한데 혹시 질문이나 리뷰가 있으실까요? 있으시다면 잠시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장면 중에 궁금한 게 있으셨나요?

 

질문자 : 이번 작업은 아니고 아까 보여주신 백지장 작업에서 A4에 무슨 프린트가 되어있는 것 같았는데, 아닌가요?

 

노 : A4용지에요? 네. 그게 첫 번째 작업이기도 했었고 일단 종로에서 사람들을 막지 않고 하는 작업이어서 사람들이 궁금해할 때 물어보지 않고 바로 알 수 있도록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뭘 하고 있는 건지 텍스트로 써 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제가 뭘 하고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이걸 읽더라고요. 2016년에, 조금 된 작업이고, 그때 실제로 썼던 종이에요.(그림)

 

고 : 그러면 관객 질문이 없으시면 다음 계획이 어떻게 되시는지 질문해도 될까요? 어떤 속담에 또 주목하고 계시나요?

 

노 : 올해 게리 힐하고 사석에서 봤었는데, 그때 게리 힐이 했던 얘기가 머리에 남아요. 대부분의 관용적인 표현, idiom이 신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작업을 하다보니까 신체적인 문제들에 관심이 많아지는 건 사실인 것 같아요. 그래서 조금 더 퍼포먼스가 가미된 작업을 더 해볼까 하는 생각은 가지고 있어요. 이게 아무래도 혼자서 작업을 하는 게 아니다보니까 그런 것들에 대한 고민이 사실 요즘 제일 큰 것 같아요. 그래서 당분간은 이런 작업을 계속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 : 제가 작가님 작업 보면서 전시라는 게 어떤 작가님이 어떤 시리즈를 갖고 있고 그 시리즈를 묶어서 정거장처럼 보여주는 느낌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그래서 ‘My Toes Are Free’ 라는 시리즈가 여기서 다 끝나는 게 아니고 계속 된다고 하니까 기대가 많이 되고요.

갑자기 이 사진을 여신 이유는 뭔가요?

 

노 : 섹슈얼리티에 대한 얘기를 하다보니까 사실은 제가 섹슈얼리티를 실제적으로 이미지에 많이 넣고 싶었던 작업은 사실 이 작업들이었어요. 이 작업은 2009년부터 컬러작업부터 하면은 한 2015년 무렵까지 되게 오랫동안 진행했던 시리즈였었는데, 저때는 오브제 자체, 물성 자체가 갖고 있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래서 흘러내리는 현상들이 되게 은유적으로 섹슈얼한 지점을 갖게 되는 것에 대한 생각을 실제로 했던 작업들은 이런 작업들이었어요.

발을 보면서 섹슈얼한 것들을 느끼지 말아야 하는 게 맞느냐 하면은 사실 그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해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주 많은 부분 동의를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죠.

 

고 : 작업을 더 많이 하다 보면은 또 다른 답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노 : 사실 이전의 작업들은 제가 작업을 할 때 시작하면서부터 내용을 완벽하게 형식화시켜놓고 작업을 시작한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그런데 이 관용어구 작업들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마무리가 잘 안 되는 부분이 많기도 하고, 그런데 마무리가 안 되는 것 때문에 많이 열리는 지점도 사실은 있기도 했거든요. 내용에 대한 마무리를 이렇게 논리적으로 끝내고 작업을 해야 되는 건지 아닌지 사실 요즘 되게 머리가 복잡해요, 그것 때문에, 일단은 제 자신의 실험적인 지점에서는 마무리를 지으려고 하는 것보다 조금 열어서 어디까지 풀어헤칠 수 있는지 그냥 스스로 가지고 있는 상태로 작업하고 있긴 해요.

 

고 : 이번 전시 작업과 과거의 작업까지 정말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다음에는 어떤 관용어구가 전시에 등장할지 기대가 많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