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된 예민함01 _ Mineral Water

표 갤러리 2013 

학습된 예민함

학창시절의 시험들을 돌이켜보면 문제들은 객관식 문항들이 주를 이루고, 이것들은 다른 것 을 찾아내는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사지선다형 문제의 경우, 4개의 항목 중에 2개 정 도는 명확히 구분되나, 남은 두 가지는 고르기에 애매한 항목들을 제시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험문제의 패턴이라 생각된다. 이들은 학생들의 교과과정 이행상황을 점검하는 방법으로는 이상적이라 사료되지만, 이것들이 갖는 부작용들은 고려되지 않았다. 나의 과장된 예민함을 학교교육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다소 옹졸하고 무책임한 변명일지도 모르나, 혹시라도 나의 의견에 동의하는 교육학자 혹은 심리학자가 있다면, 나의 변명이 그럴듯해 보이도록 조금 더 과학적인 접근을 통한 근거를 보여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러한 교육이 과장된 민감함의 시작이라면, 또 다른 과장된 민감함의 학습은 미디어를 통 해 이루어진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듯이 많은 식품 브랜드들이 서로 비슷한 제품들을 만들 어 낸다. 예를 들면 코카콜라-펩시콜라, 짜파게티-짜짜로니, 심지어 비빔면은 농심, 팔도 두 큰 식품업체가 같이 만들고 있다. 자이리톨껌과 초코파이 역시 롯데, 해태, 오리온 모두에서 생산 판매되고 있다.

아주 오랫동안 각각의 브랜드에서 나오는 비슷한 제품들의 차이를 구분하는 예민함을 자랑 으로 여기던 나는 군대에서도 초코파이는 오리온 제품만 취식했고, 콜라는 코카콜라, 소주 는 참이슬, 비빔면은 역시 팔도 비빔면이라는 주관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들의 차이를 보여 주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던 것이 1년여 전이지만, 이 프로젝트를 전시로 선보이려하는 지금 의 나는 내가 가진 민감함이 생각보다 무딘 것임을 깨달았고, 자랑으로 여기던 그 민감함이 오만이었다는 결론과 함께, 알게 모르게 주입되어진 고정관념이 문제였다 핑계대고 있다.

서른일곱 해 동안 나를 미식가로 키운 것은 8할이 메스미디어였다.


시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모이면 가장 많이 하는 가벼운 이야기의 주제 중 하나는 아마 도 먹을거리에 대한 것일 것이다. ‘어디에 가서 무엇을 먹었는데 맛있더라.’고 누군가 화두를 던지면, 그 뒤를 잇는 것은 ‘그 음식은 어디에 무슨 식당이 맛있다.’, ‘그것의 가장 맛있 는 곳은 여기’라며 자신이 아는 맛집들을 주문을 외듯 읊곤 한다. 또한 인터넷에 맛집 검색 을 해보면 블로그 조회 건수가 3,732,256건이나 되니 자신이 경험한 맛있는 집을 자랑삼아 알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입맛 까다로운 부친을 둔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맛집이라 불리는 음식점을 두루 자주 많이 다닐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덕분에 또래 중에는 미식가로 통하게 되었다. 어디 가면 무엇 이 맛이 있느냐는 친구들의 전화를 자주 받는 편이고, 맛있는 음식점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주도권을 놓치지 않는다. 편의점에서 생수를 살 때도 몇 백 원이 더 비싼 ‘삼다수’가 최고라 여기며 이를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먹은 음식들과 식생활을 돌이켜보면, 한 가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일반적으로 음식 수준이 상당히 낮다고 평가 되는 런던에서, 그것도 중저가 식당의 음식만으로도 나는 잘 살아 왔으며, 어느 식당에서나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맛을 평가하는 민감함을 부리곤 하지만 음식을 잘 남기는 편은 아니다.

30개가 넘는 생수 브랜드 생수의 맛을 구분한다는 스스로에 대한 기특함은 그 오만함이 하늘을 찔렀다. 어린 시절 처 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 당시 국내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었던 고급생수의 대표브랜드인 에 비앙을 입안에 넣는 순간, 나는 그 비릿한 맛에 고개를 저었었다. 그때부터 나의 의식 안에 는 나의 미각이 생수를 구분할 정도로 예민하다 여겼지만, 15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상황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비행기에서 막 내린 후 미지근한 에비앙을 마셨으니 당연히 비릿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의 인식 안에는 부적절한 조건을 고려하지 못한 채 섣불리 단정 지 었던 결론과 그 인상이 현재까지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종류의 생수브랜드는 과연 각각의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 물의 산지와 그 물을 위생적으로 담아내는 기술, 물의 품질 유지를 위한 노력들은 각각 달리 할 수 있겠지만, 현재까지의 기술력으로 그렇게까지 현저하게 큰 차이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각각이 가진 브랜드인지도 와 매출로 증명된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각자 다른 가격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대형 마트의 깜짝 세일을 통한 매출 양을 보더라도 고가의 제품과 저가제품의 차이가 거의 두 배에 이른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생수브랜드에 대한 선호도가 분명했던 내가 별 뜻 없는 장난스런 시작으로 이를 구분하던 것에서 진지함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실은 이들을 구분해내는 재간이 나에게는 없다는 것을 알고 부터이다.

나의 입맛에 대한 의구심으로부터 시작된 이번 작업을 위해 우선 가장 손쉽게 실험할 수 있 다는 점에서 여러 종류의 생수를 구입해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보았지만, 내가 최고의 물이 라 여겼던 삼다수를 골라낸 적은 아직 한 번도 없다. 코카콜라와 펩시콜라, 카스와 하이트, 참이슬과 처음처럼 등 비슷하지만 다른 것들로 구분지어 놓은 것들, 특히 광고에 의해 상대 방의 제품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실제로는 범인(凡人)들에게 쉽사리 구분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물론 소주와 콜라 등 특유의 맛이 존재하는 제품 들의 경우는 둘을 번갈아 마시는 상황에서는 확연히 구분된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두 제품을 마시는 경우에는 역시 구분이 어렵다. 또한 코카콜라는 그 제품 특유의 화학적 배합을 절대 노출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범죄수사에서 물방울 하나와 피 한 방울로도 범인을 찾아내는 놀라운 과학발달시대에 자료들이 넘쳐나는 콜라의 배합을 알아내지 못한다 는 주장은 쉽게 납득이 가질 않는다. 두 대형 콜라업체들은 서로의 배합에 대한 정확한 정 보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사료되며, 단지 그들은 서로 다른 맛을 만들어 내고 있을 뿐이며 계속적으로 신제품을 개발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 이 콜라 맛의 발전에 쏟는 노력보다도 광고나 제품디자인 등 맛 외적인 것에 훨씬 많은 노 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그 점이 실제 매출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학 습된 대중들은 자신이 선택한 콜라들이 우수하다는 각 회사의 주장에 별로 다르지 않은 두 콜라의 차이를 억지로 구분하고 있지는 않을까?

미디어에 의한 세뇌

미디어의 형태는 매우 많이 바뀌어 왔지만 아마도 인간이 정상적인 언어생활을 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입소문이라는 미디어는 존재했을 것이다. 어디 뭐가 좋더라. 어딜 가야 뭘 얻을 수 있더라는 일명 “카더라 통신”은 인류와 함께 동반 발전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먹는 방송 이 대세인 요즘 TV를 보면 어느 지역에 뭐가 맛있는 집인지에 대한 생활정보 프로그램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나는 전시를 위해 케이블 방송과 종편을 포함해 맛집 코너가 속해 있는 프로그램들을 세다가 결국 포기했다.

맛집이라고 방송하는 미디어에 세뇌를 당한 뒤 그 음식점을 찾아갔을 때, 과연 우리는 객관 적으로 이 맛집들을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일단 맛있는 집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찾아 간 채로 맛보기 시작한 점이 객관적인 시야를 가릴 것이고,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누군가도 자신의 까다로운 입맛을 과시하기 위한 편협한 생각에서 나온 의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얼마 전 토요일 예능프로그램인 ‘무한도전’에서 멤버들의 눈을 가린 채 인스턴트 냉면과 유 명 맛집의 냉면을 구분하는 방송편이 있었는데, 멤버들은 화학조미료가 더 들어간 인스턴트 냉면을 유명 냉면집의 냉면이라고 판단했던 방송분도 역시 같은 맥락이라 생각된다.

 

나는 생각보다 예민하지 않다.

이런 저런 생각들과 그 실험 후 내린 나의 결론은 어떤 부분에서 나는 생각보다 예민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업적인 결과, 혹은 학습의 결과로 민감함을 요구하는 사회는 나를 민감하다 여기게 만들고, 그 예민함이 남들과 다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어찌 생각하면 이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과도한 민감함이 학습되어지며 많 은 분쟁이 야기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둥글둥글하게 세상을 사는 것이 좋다 고 말하면서도 스스로에게는 민감함을 학습시키고 있는 것, 또한 남들에게는 모나지 않은 인간관계를 요구하면서도 나 자신은 예민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남들은 일반적이 고 자기 자신은 평범한 그들에 비해 예민하고 민감한 특별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착각 인 것일까?

 

이전 프로젝트 ‘Meltdown’에서 사람들이 잘 아는 오브제를 선택하여, 내가 제시하는 이미지 와 감상자의 습관적 기억 속에 있는 시각과 촉각과의 비교를 관객들에게 요구했었다. 그들 이 가지는 관념이 고정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사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비교대상을 계속적으로 제시한다. 대상들을 최대한 똑같이 제작하도록 노력 하거나, 혹은 다르게 표시되어 있지만 구분이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 사물들을 비교할 수 있게 제시하고, 그것들이 같은 것이 아님을 표시한다.

각각의 사람들이 가진 예민함이 다를 것이다. 이번 작업 이전의 나의 예민함의 정도는 높은 수준이라 여겼는데, 작업을 한창 진행 중인 지금은 자신이 없다. 하지만 내 작업을 보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예민함은 그다지 날카롭지 않습니다.” 라는 말이 하고 싶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저 가지고 있는 예민함의 근원을 한번쯤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상을 너무 예민하게 사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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