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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집 백자 White Porcelain in Chinese restaurant 

자하 미술관 2014

White Porcelain in a Chinese Restaurant_자장면집 백자

 

무엇이 백자를 아름답게 만드는가?

 

사람들은 박물관에서 수 많은 백자들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고려초기부터 청자와 함께 만들어지기 시작한 백자는 부드러운 곡선의 기형器型을 이루고, 유약은 투명하고 얇게 입혀져 순백으로 발색하며, 그릇모양은 풍만하여 양감이 있고, 은은하게 광택을 낸다. 사람들은 이렇게 고귀해 보이는 백자의 수려함과 단아함에 감동을 받지만 모두가 이러한 아름다움을 아름다움 자체로 느끼는 것은 아니다.

공예품(혹은 예술작품 전체)을 감상하는 것은 많은 훈련이 필요한데, 그것들을 감상하는 눈이 훈련되지 않으면, 감동의 폭이 매우 좁거나 없을 수도 있다.

감상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전문가에 의하면 조선시대 연꽃형상의 연적硯滴을 바라보면 그 풍만한 몸체와 물 주둥이 끝에서 바닥까지 떨어지는 선이 매우 간결하면서도 지조가 있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감동적인 부분은 자장면집의 하얀 간장 종지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재미있는 사실은 박물관에서 아름다운 작품을 접했을 때, 혹은 대형 미술관에서 책에서나 보던 유명한 작품을 접했을 때 이것들에게 감탄사를 아끼는 사람은 많지 않다.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가 보면, 모나리자 앞에만 사람들이 유독 붐비고 감탄사를 연발하는 사람들이 흔히 발견되며 피카소의 게르니카 앞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군중들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탄성을 지르는 모든 사람들이 작품의 예술성에 공감하고 있는 걸까? 또한 그 작품은 대중에게 진정한 감동을 주고 있는 걸까?

 

그 대답이 항상 긍정적이지 않을 것이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면 가치를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운 작품들이 많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어린 자녀들이 그린 그림을 보며 추상표현주의 작가의 작품과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이런 이들이 여전히 고가의 작품 앞에서 탄성 지르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혹시 사람들이 감상하고 있는 것은 작품자체가 아니라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전문가들의 평가에 있지는 않을까?

혹은 그 예술작품이 놓여져 있는 장소 때문은 아닐까? 아무도 국립 중앙박물관의 소장품의 가치가 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혹은 백자들을 품고 있는 할로겐 램프들로 인해 찬란하게 빛나는 유리상자가 그 백자를 아름답게 봐야 한다고 관객들을 조정하고 있지는 않을까?

평판에 의한 강요

 

어떤 사물을 접할 때 종종 세간의 평가가 대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게 만들 때가 있다.                                            

몇 해전 쓰레기 만두사건을 다들 기억하리라 생각한다. 만두소를 음식물쓰레기로 만든 만두 공장들이 대거 적발된 사건이다.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고 한동안 아무도 만두를 사지 않았다.

그 시기에 영세한 공장이었지만 정직하게 만두를 만드셨던 친구의 부모님은 부도를 면치 못했고, 그 친구는 지금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때 일명 쓰레기 만두를 생산했던 대기업들은 여전히 만두를 만들어 높은 매출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 때 정직한 만두를 만들던 영세한 만두 업자들을 한동안의 매출부진을 이기지 못하고 많은 업체가 문을 닫았다. 만두 업자들은 언론의 보도가 무책임하고 무성의하다는 탄원을 제시했지만, 이때의 언론의 보도는 매우 정상적이었다. 쓰레기만두를 만들었던 업체들은 일부 공장에서 만들어 내던 만두들이라고 명확히 보도했으며, 영세한 만두업자들이 줄도산 위기에 이르자, 모든 만두업체가 그렇지 않았다고 정정 보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언론권력에 의해 이미 기울어진 대중의 움직임은 모든 만두 소비를 중단하게 만들었고, 영세만두공장들의 도산을 막지는 못했다.

때론 평판이 개개인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내가 자장면집 백자를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위의 만두사건처럼 심각한 결과를 낳을만한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우리가 박물관에서 바라보는 백자도 어린 시절부터 교육에 의해 고귀하고 귀중한 것이라는 인식이 박혀 백자를 명확히 보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것들의 문화재적인 가치를 비하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나 역시도 박물관에 가면 오래된 도자기들에 감동하여 눈을 떼지 못하는 이들 중의 한 명이며, 그 아름다움에 취해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 중에 하나 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감상들이 온전히 나의 시각에서 나왔는지, 혹은 교육에 의해 세뇌된 고귀한 평판으로부터 나왔는지에 대한 의심은 여전히 떨쳐낼 수가 없다. 박물관에서 어두운 분위기에 핀 조명을 받고 있는 도자기가 갖는 분위기가 그것의 가치를 주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혹은 박물관에서 삼엄한 경비 시스템들이 대중들을 압도하여, 이것은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강요를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왜 자장면집 그릇인가?

 

1990년대 말 당시 젊은 4인조 그룹인 GOD의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라는 가사를 담은 노래가 많은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내가 지금도 궁금해 하는 것은 그 노랫말을 쓴 사람이 나와 같은 세대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배경이 어떤 사람이기에 그의 어머님이 아이들에게 자장면을 먹이기 위해 본인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신다는 가사를 써내려 갈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왜냐하면 나의 어린 시절 자장면은 그리 귀한 음식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세대에게는 자장면이 어린 시절 할머니의 치마자락을 꼭 붙잡고 터에 따라 나갔다가 횡재한 듯 얻어먹는 자장면이었다는 이야기는 나에게 마치 전설처럼 들린다. 오히려 나에게 자장면은 조금 서운한 음식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모임이 있어 나의 식사를 챙겨주지 못하실 때 현관에 오천 원짜리 지폐와 함께 말씀하셨다.

“자장면이나 시켜먹으렴.”

 

사실 아버지 세대와 나의 세대 차이를 가늠해보면, 대한민국의 어려웠던 시기는 아주 오래 전은 아니다.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가파른 성장은 자장면을 특별한 날을 위한 음식에서 한끼 때우는 음식의 수준으로 너무 빨리 떨어트렸다. 물론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적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을 뿐, 자장면 자체가 가지는 수준의 문제는 아니다.

 

이러한 상황은 자장면집 그릇들을 미술관에 전시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리라 생각한다. 또한 이들이 미술관에 놓여있을 때, 관람객들은 과연 조선시대 백자와 자장면집 플라스틱 그릇의 가치를 올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미술관의 백자전시 형식을 빌어 자장면집 그릇들을 전시함으로써 각 대상이 지닌 가치에 혼란을 느낀 관람객들이 기존에 본인들이 알고 있던 백자에 대한 예술적 안목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것을 기대한다. 이런 의구심 속에 평판, 정보, 사전지식, 선입견이라는 단어들로 바꿔 부를 수 있는 이미 세뇌되어버린 미적 감각에 독립성을 불어 넣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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