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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에 대처하는 자세_A Better Posture for Tristimanina

Space xx-2017.08.11-08.21

‘난 열심히 하지 않아서. 버려진 것뿐이다.’

- 미생-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자주 듣던 이야기가 있다.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는 최고가 될 수 있다.’라는 전래 동화에나 나올 법한 내용의 훈계. 아버지의 그 말들을 100% 순종하지는 않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자 나에게 차곡차곡 쌓여 나의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아 왔었다. 신념이나 가치관은 아니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기준점 정도라고 하자. 내가 사는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칭찬받지 못한 것은, 노력 부족으로 단정했다. 그래서 늘 내게 필요한 것은 끈기 였고, 성실함 이었고, 노력이었다.

날이 쌀쌀 해지기 시작한 2017년 늦가을, 나의 귀에 한 소녀의 이야기가 들어왔다. 아시안 게임 승마 메달 리스트 였으며,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대학에서 실력을 갈고닦는 소위 말하는 ‘체육 엘리트’였다. 언론에서 ‘승마 유망주’라 소개했으며, 대통령이 직접 그녀의 기량에 관해 이야기했다. 어느 날 그녀의 행적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에 의해 실체가 드러났다. 그녀의 엄마는 소위 말하는 ‘비선 실세’, 그녀가 소유하던 명예와 권력은 엄마가 만들어 준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후 그녀의 어머니 였던 ‘최순실’의 만행이 폭로됐다. 사람들은 분개하여 촛불을 들고 광화문 모였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춥고 무기력한 겨울이었다.

유독 어둡고 추웠던 겨울. 나는 그 광화문 현장에 있었다.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현 정부에 모든 것을 비판하기 위해 참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학창시절 ‘미선이 효순이’ 사건 촛불 시위에 나가자고 권유하던 친구의 말에 앞서 고개만 끄덕거릴 만큼 겁이 많은 나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토요일 저녁 6시가 되면 무언가에 이끌리 듯 광화문으로 향했고, 7주 동안 쉬지 않았다. 중간에 품절이라 구할 수 없다던 LED 촛불을 샀고, 참석하지 못하는 집회는 인터넷 생중계를 통해 관람했다. 무엇이 나의 마음을 감동시켜 내 몸을 광화문으로 이끈 것이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생긴다. 그동안 두려움에 발길조차 떼지 못했던 곳을, 한번이 아닌 7주 동안 계속 다닐 수 있는 용기를 주었을까?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고 수많은 사람과 그에 관련된 일화들이 기사화되었다. ‘최순실’의 눈에 들어 같이 권력을 행사 했던 사람들 역시 이름과 행적이 공개됐다. 그들은 대한민국을 본인의 것처럼 주무르고 그에 나오는 이득을 취해 각자의 세를 취했다. 편법으로 높은 학력에 올랐으며, 이를 통해 명예도 취했다. 한편 기득권자들에 의해 좌천되고 직장을 잃은 사람들의 이름 역시 인터넷상에 오르내렸다. 대부분 힘 있는 자들의 권력 남용이나 편법 사용에 반대하며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권력자들의 힘에 의해 굴복되었고 세상에서 빛을 잃었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의 성공 요인이 세상에서 사라져 갔다.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은 아버지가 늘 말하던 ‘노력으로 성공하는 세상’이 아닌 듯했다. 기득권은 본인의 권력을 유지하며 세를 불렸고, 기득권에 옆에서 감언이설로 본인의 이득을 챙겨가는 사람들이 점점 성공했다. 그들 밑에서는 ‘백도 실력이고 아부도 능력이다’라고 당당하게 외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보 취급했다. 이로 인해 다가오는 계층의 격차는 점차 거쳤다. 이 시점에서 나는 기준점을 세상에서 되찾겠다는 의협심이 생겼다. 그 마음이 나를 광화문으로 이끌었다. 결국 ‘최순실’은 무너졌고, 최순실과 함께 이득을 챙긴 사람들이 모두 법정 피고인 자리에 섰다.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온 듯했다.

이후 대한민국은 촛불의 겨울이 지나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 되며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그 사이에 나에게 사회초년생 으로서 겪는 몇 가지 사소한 일들이 있었다. 당시 누군가는 나에게 노력이 부족하다고 했다. 책임감이 없는 모습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노력과 성실함이 부족하여 오늘 결과임을 당연하게 인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를 정죄 했고 계속해서 채찍질했다. 마음이 피폐 해져 갔다. 하지만 막상 세상에서 인정받는 기준은 이야기와는 달랐다. 높은 사람과 친한 사람이면 노력하지 않아도 인정받았고, 어느 순간 좋은 자리를 꿰찼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버렸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는 이미 또 다른 ‘최순실’이 있었다. 또 다른 ‘최순실’은 내가 사는 세상에서 권력을 행사했고, 구성원들은 권력에 눈에 들기 위해 발버둥 쳤다. 나는 무엇을 위해 광화문에 나갔고 촛불을 밝혔는가? 조금만 눈을 돌리면 노력이 아닌 아부와 편법으로 권력을 취하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회 초년생인 나에게는 너무 버거운 광경이었다. 큰 절망과 무기력함을 느꼈다. 상식보다는 비상식이 앞서는, 저울보다는 돈이나 주먹이 앞서는 사회가 바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였다.

‘최선을 다하는 삶’을 강조했던 아버지의 삶 속에서도 기준점이 무너져 있었던 건 마찬가지였다. 평소 별문제가 없다가도 진급 시기가 되면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진급을 위한 평가를 앞둔 상황에서 갑자기 타지로 발령이 통보되었다. 이해가 안 되는 이유로 낮은 평가점수를 받기도 했다. 아버지는 동기, 후배들보다 진급이 뒤처졌다. 일을 못 해서도, 사건을 일으켜서도 아니었다. 상급자에게 선물이나 아부를 일절 하지 않으신 것이 아버지의 승진에 최대 장애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묵묵히 그런 세상을 견뎌내며, 내 앞에서는 동화 같은 말들을 인생의 교훈처럼 말씀하셨다. 언젠가는 노력과 성실이 빛을 발하는 시기가 올 것이라 믿으며 나에게 말을 건네셨다.

생각하다 보니 질문이 하나 생겼다. 내가 답답하고 속상해하는 현재의 사회구조 안에서 나는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비판에 하려면 나 자신도 떳떳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모습을 대뇌인 순간, 저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더욱 분하고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내 입을 닫았다. 나도 역시 실력보다는 인맥으로, 정식적인 절차를 밟기보다는 관계자에게 접근하여 편법적인 방법을 선호했던 대한민국 사회의 일원이었다. 좋은 기회를 줄 법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갔고 나의 모습을 어필하려 노력했다. 더러워도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자신을 위로했던 나의 모습을 대뇌였다. 비상식적인 사회를 위해서 광화문에 나갔지만, 결국 대한민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나의 이득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2017년 여름, 나는 더위를 먹은 듯 무기력하다. 대다수 청년이 느끼는 것처럼 꿈이 없어서, 직장이 없어서 아니다. 나는 꿈이 있고 현재 직장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어떤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점을 잃었다. 기준점을 되찾기 위해 광화문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최순실’은 심판대에 올랐고, 대한민국은 바뀌는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은 세상은 모든 것이 엉켜 있는 거대한 정글 같았다. 나무들 얽혀 있고 나무마다 붙어있는 넝쿨로 하늘이 깜깜하기만 하다. 

깜깜한 하늘은 언제쯤 밝아질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던 기준점은 언제쯤 정답이 될까?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스스로 기준점을 간직하며, 양발을 땅에 붙이고 넘어지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숲에서 한 그루의 소나무가 되기를 꿈꾼다. 내가 잘 성장해 나가면 옆에 소나무들이 자라게 되지 않을까? 이 땅에 소나무 들로 가득 차 덩굴들이 사라지는 날들을 기대해 본다. 그 날에는 이 땅에 다시 빛이 들게 될 테니까. 그렇게 우직한 소나무가 되기를 다짐한다.

 

토탈미술관 코디네이터 이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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